연극인 윤소정 어머니 문수남 여사

 “일단 나아갈 방향 정하고 선택했으면 앞 일은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한다”고 가르치신 올곧은 어머니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한국 정부와 함께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오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여고시절, 연극을 사랑했던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항상 고마움이 앞선다. 내가 탤런트가 되고 연극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이 순전히 나의 어머니 문수남 여사의 발 빠른 재능 발견 덕분이라고 생각한 까닭에서이다.

사실은 어머니도 여고시절 연극을 사랑하는 소녀였다. 오죽했으면 연극활동을 하다 연출지도 하러 온 아버지와 눈이 맞아 결혼까지 했을까?

내가 연기를 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연출가 겸 배우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몇 해전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윤봉춘 선생이고, 큰오빠는 대종상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수상한 시대극 ‘살어리랏다’를 연출한 윤삼육 감독이다.

나는 이런 집안 내력 때문인지 연기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받아들였다. 물론 집안의 반대는 없었다. 반대는커녕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의 연기생활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동양방송이 개국하던 때 무용수와 탤런트 공채를 한꺼번에 통과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운명처럼 탤런트를 선택했다.

어렸을 때부터 느껴온 연기에 대한 매력을 떨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한동안 그곳에서 연기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박진씨의 권유로 연극세계에 뛰어들게 됐다.

‘산불’이 나의 첫 무대였고 그 다음부터 연극은 내 생활이자 목표가 돼버렸다. 연극을 하다가 브라운관으로 들어가는 배우들이 대부분인 현 세태를 볼 때 나는 조금 유별난 편이다. 아마도 탤런트를 하다가 연극으로 돌아선 후 내내 연극만을 고집하고 있는 배우는 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나는 연극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굉장히 높다. 또 나는 정말 연극을 사랑한다. 가난하지만 모두가 형제 자매와 같은 동지끼리 하는 연극 속엔 쉽게 말로 형용 못할 매력이 숨어 있다.

영화는 영원하지만 연극은 한 순간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순간’의 매력이야말로 대단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에서 제각각 다른 모습과 이미지로 영원히 머무르는 연극의 그 ‘순간’이야말로 영원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항상 칭찬만 해주신 어머니

물론 영화도 매력적인 예술이다. 얼마 전 영화 ‘올가미’에서 시어머니 역을 맡아 했을 때도 마치 친정 나들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 역은 나에게 있어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한 번쯤 해봄직한 역할이었고 그만큼 욕심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역시 연극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내가 그 동안 했던 작품으로는 최근에 막을 내렸던 ‘신의 아그네스’를 비롯하여 ‘첼로’,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이 있다.

특히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 역을 했을 때는 정말 그 역할에 완전히 빠져서 지낸 기억이 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내 기억에 남는 작품은 다름 아닌 ‘초분’이다. 이 작품을 위해서 10개월 동안 나는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연습을 했다. 매 끼니를 거의 짜장면과 라면으로 때우다시피 하면서 매달린 시간이었다.

물론 고생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연극의 매력에 담뿍 빠져버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 나이 28세 때의 일이다.

나는 후배한테도 웬만하면 꾸중하는 일이 없다. 되도록이면 칭찬을 자주 한다. 후배들에게 연극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어머니도 항상 나에게 칭찬을 해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칭찬이 나한테는 무엇보다 도움이 됐다.

그러고 보면 나는 칭찬 복이 유난히 많은 사람이다. 작품을 할 때마다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찬사가 되돌아 왔으니 말이다. 매우 고마우면서도 죄송스럽다.

그래서 매번 “다음 작품에서는 정말 그 동안 받은 찬사에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해야지” 하고 결심한다. 그런데도 작품이 끝나면 항상 내 연기가 불만족스럽고 쏟아지는 칭찬이 민망스럽기만 하니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그 때문인가, 수없이 많은 작품을 했으면서도 무대에 오를 때마다 신출내기 배우처럼 불안하고 초조하다. 심지어는 무대가 무서워 보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내 딸이나 후배들이 들으면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재능 있는 분야에서 성공하면 된다

그래도 나는 내가 배우인 것이 좋다. 세상에 배우만큼 매력적인 직업은 없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을 흉내 내는 직업이 배우지만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기하다 보면 내가 정말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다.

아버지는 청렴하신 분이셨다. 그 당시 영화감독의 수입이란 게 뻔한데도 도무지 돈에 욕심을 내시지 않았다.

10년간 예총 회장까지 지내셨지만 돈 한푼 거저 얻으신 적이 없었다. 미스코리아대회 심사위원이나 각종 영화제 심사위원에 무수히 위촉되셨지만 잘 봐달라며 들어오는 봉투는 모조리 돌려보내셨다. 예술가라는 직업에 높은 자긍심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어머니는 빠듯한 수입으로 6남매를 키워내느라 알게 모르게 죽을 고생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것은 어떻게 어머니가 여섯이나 되는 우리들을 키우고 가르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어머니는 특별히 직업을 갖지도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어렵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의연하게 버티셨다.

게다가 6남매를 그냥 평범하게 키우신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 개성과 재능을 한껏 살리고 사는 전문인으로 잘 키우셨다.

어머니는 그 당시의 다른 어머니들과는 달리 꼭 공부만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셨다. “재능이 있는 분야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그 재능을 키워 그 분야에서 성공하면 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깨어있는’ 어머니셨다.

앞서 얘기한대로 큰 오빠는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고, 큰 언니도 한국에서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영시와 영수필을 쓰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스물 아홉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건너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출중한 영어실력을 지녀 부업으로 법정 통역 일을 하고 있다. 작은 언니도 그림을 곧잘 그려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민주적이면서 합리적이었던 어머니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만 나오면 춤을 곧잘 추곤 했다고 한다. 그걸 보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그 길로 무용학원을 향하셨다.

“잘 가르친다는 무용학원에 가야 한다”며 이리저리 수소문하고 다니셨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정식으로 가르치는 무용학원에서 기초를 아주 잘 닦을 수 있었다.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한 무용이 내 연기에 크나큰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지금도 몸 동작이 남다르다는 칭찬을 많이 듣는다.

나는 혀가 좀 짧은 탓인지 대사를 할 때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나에게는 그것이 큰 단점이었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평소에도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의 연기동작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예전에 ‘신의 대리’라는 작품을 할 때 아무 말 없이 한동안 걷기만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원로배우 최상현 선생님께서 나의 동작을 보고 크게 감탄하신 적이 있다.

그 이후에도 나의 동작은 연극계에서 보기 드물 만큼 완벽하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어머니가 만일 나에게 무용을 가르치시지 않았더라면 나의 연기는 지금보다 한참 부족했을 것이다.

이렇듯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헌신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대처하셨다. 다른 예로 어머니는 집안에선 말 한마디도 조심하시는 분이셨다.

우리는 한번도 어머니한테서 상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선지 나는 학교 친구들 사이에 부르는 ‘요 기집애’, ‘요 년’, ‘요 놈’하는 애칭도 굉장히 심한 욕처럼 들려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다. 나 역시 우리 애들한테 욕 비슷한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어머니도 반 예술가

행여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어 매를 대야 했을 때도 어머니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셨다. 이를테면 “네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으니 매를 맞아야 하는데 몇 대를 맞겠느냐?”는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 6남매는 자라면서 감정이 섞인 매는 한 차례도 맞은 기억이 없다.

우리는 어머니의 이런 교육 방침 속에서 충분히 ‘자유의사’를 만끽하며 자랐다. 우리의 의견은 타당한 것인 이상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아무도 불만스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하지 말라’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다. 다만 “내 의견은 이런데 네가 정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그리고 이왕 시작할거면 열심히 해라”정도였다.

어머니 덕분에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항상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는 나도 어머니지만 가끔 “내가 과연 나의 어머니만한 어머니인가?” 자문해보면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아버지가 영화계의 큰 거목이셨던 탓으로 나는 예술의 향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 당시에는 필름 편집을 감독이 직접 했으므로 집에는 늘 필름조각들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편집을 하실 때는 긴 조각, 짧은 조각의 필름들이 온 집안을 메우다시피 했다.

그런 것들은 어린 나에게 장난감이 되었다. 필름을 가지고 배도 만들고 집도 만들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나도 원래 영화하고는 깊은 인연이 있는 셈이다.

게다가 집에는 아버지가 데리고 있던 영화인들로 항상 붐볐다. 이른바 집도 절도 없는 영화 스탭들을 거두기 좋아 하시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또 무슨 날만 되면 남들은 스크린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배우들이나 감독들을 무수히 만날 수 있었다. 집에 영사기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영화 또한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어머니도 반 예술가셨다. 아버지가 제작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신 적도 있었고, 돌아가시기 전에 오빠가 만든 영화나 내가 출연한 연극은 빼놓지 않고 보셨다.

 

아버지는 전면에서, 어머니는 이면에서 예술혼 일깨워

물론 나름대로의 충고와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하는 연극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와서 보시는 어머니에게서 ‘딸의 선택을 믿고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무한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빠 윤삼육은 시나리오 작가로 1백여 편이 넘는 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삼육필름 대표로 ‘살어리랏다’를 제작한 바 있다.

아버지가 집안의 전면에서 자녀들의 예술혼을 일깨웠다면 어머니는 이면에서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셨다.

영화인 집안에서 자란 나도 운명처럼 또 연기자 가정을 꾸렸다. 동양TV에서 연수 받을 당시 사제지간으로 만난 오현경씨와 자연스럽게 한 가족이 되버린 것.

게다가 딸인 오지혜도 배우다. 연극도 하고 영화도 한다. 97년 ‘비언소’로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영화 쪽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정숙으로 나왔고, ‘초록 물고기’에서는 순옥, ‘노는 계집 창’에서는 AIDS 걸린 창녀 애리로 나왔다.

우리 가족이 모이면 서로 이렇게 부른다. “어이 탤런트, 어이 연극배우, 어이 영화배우!” 연습할 때는 서로 간섭을 안 하는 편이지만 일단 작품이 나오면 가장 열성적인 모니터, 냉정한 평론가가 된다.

나는 적어도 연기생활을 하는 배우라면 자신을 개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내 뒤를 이어 배우가 된 딸에게도 항상 주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 번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무수한 연습과 노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 눈물과 땀이 없으면 단 열매 역시 없다. 적어도 자신이 배우라고 생각한다면 끊임없이 배우로서의 자신을 개발해야 한다.

요즘 TV브라운관을 주름잡고 있는 명 탤런트들을 가만히 살펴 보면 대부분이 연극배우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려웠던 연극배우 시절에 흘린 땀과 눈물이 TV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네들은 누가 봐도 아무데서나 톡톡 튀어나오는 나 어린 탤런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연기력을 갖추고 있다.

배우의 생명력이 한때 반짝이는 아름다운 겉모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 스토리는 웬만한 영화나 세기적인 로맨스 못지 않다. 거의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이다. 그럼 독립투사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는 어떤 사람들일까? 물론 친일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외할아버지가 바로 친일파 인사였다. 고종황제를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분이었다고 한다. 친일파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

떵떵거리고 잘 사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 두 집안의 남녀가 결혼을 하겠다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마 가문이 어울리지 않는 것을 따지자면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양가 집안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사실 독립투사 집안과 친일파 집안이 사돈이 되다니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급기야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금족령을 내리고 집안끼리의 혼사를 따로 진행시키셨다. 마침내 결혼 날짜가 잡히고 식 올릴 준비 역시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결혼식 바로 전날 어머니는 도망을 쳐버렸다.

지키던 사람들을 따돌리고 몰래 담을 넘어 아버지에게로 달려온 것이다. 그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 근처의 중국집에서 냉수 한 잔을 올려놓고 맞절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다르게 둘 사이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식 결혼식은 25년 만에 치러졌다. 은혼식을 아예 결혼식으로 바꿔버린 것이었다. 결혼식 장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명동에서 가장 큰 중국집 ‘아서원’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날은 우리나라 영화계의 모든 인사들이 일제히 일손을 놓고 결혼식에 참석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리는 성대하고 화려한 잔치였다.

아마도 그 날이 어머니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 게다. 어머니는 평생 그 순간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어머니는 가끔 그 날을 회상하며 눈물짓고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어렸을 적부터 수없이 들은 결혼이야기였음에도 질리지가 않았다.

 

결혼문제, 진로문제에 자식들 의견 충분히 존중

어머니는 처녀 시절에도 이른바 ‘깨어 있는 신여성’이셨다. 당신이 그런 결혼을 하셔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우리 6남매중 어느 누구의 결혼도 반대하신 적이 없다. 그 당시로서는 6남매가 모두 연애 결혼을 했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결혼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자식의 의견에 따르셨다. 진로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의 의견을 충분히 인정해주셨다.

다만 어머니는 거짓말에 대해서는 단호하신 분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때 아침에 받은 돈으로 산 전차 회수권을 몽땅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다시 돈을 달라고 말씀 드렸는데 버럭 역정을 내셨다. 내가 돈을 따른 데 쓰고 핑계를 대는 줄 아셨던 것이다.

그 길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내가 회수권을 샀다는 아저씨에게로 가셨다 다행히 나를 기억한 아저씨가 “틀림없이 저 학생이 아침에 회수권을 사갔다”고 말해줬다.

아버지는 말없이 내 손을 꼭 쥐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그 얘기를 듣고 나에게 “의심해서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하시며 사과하셨음은 물론이다.

“왜 더 잘해드리지 못했을까?” 부모를 여읜 자식이라면 누구나 이런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십 몇 년을 더 사신지라 6남매가 돌아가신 아버지 몫까지 잘해드린다고 나름대로들 노력하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돌아가시자 가슴에 남는 설움은 결코 적지가 않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어머니 살아계실 적에 뭘 해드렸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게 된다. 특히 의상실을 운영하면서 어머니 가죽 코트를 돈 받고 해 드린 것이 생각난다. 물론 가죽 값만 받았지만 “왜 그냥 해드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남아 마음이 절절하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가죽코트가 아니라 모피 코트 몇 백 벌이라도 해드릴텐데. 이런 경우에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인가 보다. 지나치게 청렴하신 아버지덕에 6남매를 훌륭히 키워내시느라 고생 고생하신 어머니. 적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가셨다는 야속함이 앞선다.

 

가죽 코트 그냥 해드릴 걸…

미국의 여류작가 스타더트는 ‘어머니’의 의미를 “문화를 넘어서 가정과 세상의 중심이 되고 사랑이 넘나드는 수로이며, 모든 인류를 키우는 최초의 손길”이라 표현했다.

6남매를 키우며 감당하고 감수했던 어머니의 역할을 회상하며 다시 한번 어머니의 큰 힘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 어머니와 겪은 내적 갈등, 어머니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들을 이제는 나도 어머니가 되어 어머니를 이해하며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어머니의 진정한 역할은 자녀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친구가 되고 자녀의 뒤에서 지켜보며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자녀와 함께 하고 자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보조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즘도 나는 수시로 어머니를 떠올린다. 살아 생전에 남들처럼 멋도 부리지 못한다고 투정했던 내 자신이 한없이 철부지로만 느껴지지만, 한편으론 어머니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자신을 벼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는 “사람을 키운다는 것이 물리적 보살핌과 정신적 가르침을 뛰어 넘어 하나의 영혼을 열어 주는 것”이라 생각하셨다.

내 삶에 있어 어머니는 바로 내 자신이었다. 어머니는 영원히 나의 삶을 이끄는 ‘등대’이다. 어머니 얘기를 하다 보니 유난히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가 조금만 더 오래 사셨더라면 이젠 정말 잘 해드릴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에 눈가가 젖지만 내 마음을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시리라.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가지

 

  1. 거짓말은 안 된다

어머니는 거짓말에 대해서는 단호한 분이셨다. 고등학교 때 아침에 받은 돈으로 전차 회수권을 샀다가 몽땅 잃어버려 별 생각 없이 다시 돈을 달라고 말씀 드렸는데 어머니는 내가 돈을 따른 데 쓰고 핑계를 대는 줄로 오해를 하셨다. 결국 그 일이 거짓이 아니었음이 확인돼 “의심해서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셨지만 어머니는 거짓말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분이셨다.

 

  1. 자신의 인생은 자기 것, 스스로 앞길 개척하라

어머니는 “일단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선택을 했으면 앞일은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부모나 선생님은 올바른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게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1. 잠시 편하자고 남부끄러운 짓 해서는 안 된다

이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잠시 잠깐의 위기 모면을 위해 정당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1. ‘하지 말라’는 말은 아껴라

우리는 충분히 ‘자유의사’를 만끽하며 자랐다. 우리의 의견은 타당한 것이면 전혀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고, 아무도 불만스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하지 말라’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다. 다만 “내 의견은 이런데 네가 정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그리고 이왕 시작할거면 열심히 해라”정도였다.

 

  1. 평생 공부하라

제 아무리 정상의 자리에 있다손 치더라도 지속적인 공부와 발전이 없으면 후배들에게 추월 당하게 마련이다. 때문에 어머니는 나에게 항상 남보다 한발 앞서 갈 수 있도록 꾸준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셨다.

 

  1. 말을 조심스럽게 하라

어머니는 “별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에서 문제가 생기고 오해가 생기기 때문에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실제로 어머니는 우리에게 아주 사소한 욕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1.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라

“자신이 아무리 그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가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때로는 전혀 문외한일 것 같은 사람의 이야기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자신을 끊임없이 계발하라

나는 연기생활을 하는 배우라면 자신을 계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내 뒤를 이어 배우가 된 딸에게도 항상 주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 번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무수한 연습과 노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 눈물과 땀이 없으면 단 열매 역시 없다.

 

  1. 노력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나는 혀가 좀 짧은 탓인지 “대사를 할 때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나에게는 그것이 큰 단점이었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평소 피나는 노력을 했다.

 

  1. 연극배우란 직업에 자부심을 가져라

나는 내가 배우인 것이 좋다. 세상에 배우만큼 매력적인 직업은 없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을 흉내 내는 직업이 배우지만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기하다 보면 내가 정말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다.

 

  1. 하나의 동작에도 혼을 담아라

자신이 맡은 역이 별 볼 일 없는 것이라서, 별 애착이 안가는 것이라서 대충대충 넘어가서는 안 된다.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는 정성이 있는 사람만이 큰 배역에서도 진정한 최고가 될 수 있는 법이다.

 

  1.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정성을 다하라

대본에 있는 대로 외워서 기계적으로 대사를 해서는 진정한 연극배우라 할 수 없다. 아무런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대사일지라도 혼을 실어 대사하는 자세를 길러야 한다.

 

  1. 자신의 작품에 쉽게 만족하지 말고 부단히 개선하라

나는 작품을 할 때마다 늘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찬사가 나왔다. 그래서 매번 “다음 작품에서는 정말 그 동안 받은 찬사에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해야지” 하고 결심한다. 그런데도 작품이 끝나면 항상 내 연기가 불만족스럽고 쏟아지는 칭찬이 민망스럽기만 하다.

 

  1. 자신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장점을 최대한 발전시켜라

어느 분야의 누구이든 완벽한 사람은 없다. 자신의 단점은 꾸준한 개선 노력으로 극복하고, 장점을 최대한 살려 크게 어필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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