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과 빈말 사이

“언제 술 한잔 합시다.” 혹은 “조만간 한번 들를 게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들입니다. 특히 요즘같이 코로나19 때문에 한동안 못 만났던, 그래서 오랜만에 마주치게 된 지인을 향한 이 인사는 재회의 설렘과 함께 작은 기대까지 더해져 상당히 기분 좋은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언제’라든가 ‘조만간’이라는 단어가 주는 애매한 시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다음 주 혹은 한달 후가 될 수도 있고 끝내 실현되지 않는 빈말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한국인 친구의 “밥 한번 먹자”는 이야기에 다음 주, 그 다음 주 내내 연락을 기다렸다가 뒤늦게 그게 한국적(?) 정서에서 오는 흔한 인사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한 외국인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오늘 당장 계약하잡니다.” 더할 나위 없이 듣기 좋고 반가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정작 오케이 사인을 보내면 그 ‘오늘 당장’은 하루, 이틀, 사흘이 가고 1주일, 2주일… 또 기약 없이 흘러갑니다. 얼른 모든 걸 해결하고 마무리 짓고 싶은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속이 타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여러 가지 일과 많은 사람들이 톱니바퀴처럼 연결돼 있게 마련인데, 그래서 한쪽에서 일이 지연되거나 어긋나버리면 줄줄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건데도 그런 사람들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계약은 물론,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내가 뱉은 말은 철저히 지키는 게 기본이고 상식인데 그걸 지키기가 그렇게 어려운 모양입니다.

굳이 열두 시 반까지 우리 사무실로 오겠다고 해서 점심까지 굶고 기다리는데 한 시가 훌쩍 넘어도 소식이 없습니다. ‘언제쯤 도착하느냐?’는 전화를 넣으니 ‘약속을 깜빡 했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빗속을 뚫고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당사자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곳 직원이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그랬나? 나, 지금 치과에 와있으니까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해” 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옵니다.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들입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약속시간에 늦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존재는 합니다. 하지만 아주 부득이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저는 약속 지키기에 최선을 다합니다. 가능하면 약속시간보다 10분 정도 미리 도착하는 것을 나름의 원칙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부터 취재가 됐든 다른 어떤 약속이 됐든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일단은 상대에게 꿀리고(?) 들어가게 되고 만남의 이니셔티브도 쥐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차라리 조금 일찍 도착해서 숨도 좀 고르고 이런 생각과 저런 계획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게 훨씬 효율적입니다.

이렇듯 약속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꼬장꼬장함을 갖고 있던 터라 미팅시간에 늦는, 특히 기사 마감시간을 안 지키기거나 못 지키는 후배기자들에 대해서는 ‘사람도 아니다’ 싶을 정도로 지랄(?)을 떨곤 했습니다. 때문에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면 후배기자들이 벽에 해골바가지 그림을 슬그머니 걸어놓고 알아서 야근 혹은 철야작업을 하는 풍토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평소 맘씨 좋은 동네 형, 다정한 오빠처럼 친근하던 모습이 이때만 되면 180도 돌변하곤 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겁니다.

저는 성당 미사시간이나 영화 시작시간에 늦어서 허리를 숙인 채 모기 소리 만하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다른 사람들 사이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합니다. 10분만 아니, 5분만 일찍 나가면 될 것을 왜 그런 불편함과 구차함을 겪는 건지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겁니다.

아내와 저는 우리 아이들과는 물론, 에이든 에밀리와의 아주 작은 약속도 철저히 지키려 노력합니다. 어릴 때부터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생활화 돼있어야 어른이 돼서도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두말 할 나위 없이 자식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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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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