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대한 확신 없는 교회 공동체는 교회 밖 공동체와 별 차이점 없어

사람마다 선호도가 다르겠지만, 필자는 성경을 다독보다는 정독 혹은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말씀 한 단어 한 단어를 깊이 묵상하며 읽기를 권유한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특히 바울 서신에 쓰여진 모든 글자 하나하나는 굉장히 깊고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시대상, 사회상, 시대 정신, 철학, 문화, 사회적 행동양식 등을 내포하고 있다.

 

01_정독, 끝장토론

제기된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고학자’ 혹은 ‘수사관’의 심정으로 상상력을 총동원해 추적해야 한다. 성경을 역동적이고 더욱 생동감 있게 읽으려면 ‘왜 저자가 이 말을 했지? 그 이유가 뭐지?’ 하는 질문을 던지며 끊임없이 소위 ‘끝장토론’을 해야 한다.

한 예로, 고린도전서에는 ‘몸’ (body, 그리스어 ‘소마’)이란 단어가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단어는 고린도 전서에서 무려 4가지의 전혀 다른 의미– 1) 인간의 살아있는 몸, 2) 식물이나 씨 구조를 형성하는 몸, 3) 사람들의 연합된 그룹, 4)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이 다독을 해야만 이 단어의 이런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까? 이런 의미를 파악하려면 다독보다는 정독을 해야 한다. 성경 말씀 하나 하나를 깊이 묵상하며 스스로 연구하지 않으면 절대 얻어낼 수 없는 지식이다.

또 다른 예로, 고린도전서 1-4장까지 ‘지혜’ (wisdom, 그리어 ‘소피아’)란 단어가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어느 책보다 많이 나온다. 이 ‘지혜’는 그 당시 시대상, 정신 세계, 사회적 행동 양식, 고대 그리스 철학 사조를 너무나 잘 반영하는 단어이다.

그 당시 언어로 ‘지혜롭다’는 의미는 교육 수준과 학식이 높고, 아주 부유한 집안이며,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극소수의 아주 부유하고, 로마제국의 최상류층의 사람들만 실력 있고 명성 있는 철학자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가장 비싼 등록금은 1000드라크마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1드라크마는 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 한다. 오늘날 호주 화폐가치로 계산하면 대략 20만불($200×1000일, 한화 1억 8000만원)이다. 어마어마한 수업료이다. 자녀교육이라면 ‘종교적 열성’을 가진 한국의 부모들 가운데 이렇게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며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과연 몇 가정이나 될까?

이처럼 ‘지혜’라는 단어 이면엔 당시 경제 사회적 차별성의 계층 구조가 숨어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많은 숫자로 다독한다 할지라도 이처럼 단어의 숨어있는 의미를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려면 깊은 묵상과 함께 많은 시간의 투자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02_그들의 삶 속으로

성경이, 특히 고린도전후서가 삶의 깊숙한 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성령님의 강한 능력으로 신앙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 자신이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들과 함께 숨쉬고, 그들과 함께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매일매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그들과 함께, 매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주님 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소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친 그들의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몸부림 없이는 절대 성경이 인간의 삶 속에서 변화나 도전을 일으킬 수 없다.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집어놓는 생명력 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고린도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하나 하나 짚어가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세상의 지혜 (worldly wisdom)를 하나님의 지혜 (The wisdom of God)보다 더 선호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고전 1-4장).

몇몇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성적으로 부도덕한 삶을 교회 공동체 회원이 된 후 (크리스천이 된 후)에도 여전히 이어가고 있었다. (고전 5장)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성도들 사이의 다툼을 세상 밖의 법정으로 끌고가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심판을 받았다. (고전 6장)

미혼의 여/남성이 결혼해야 하는지? 이혼한 여/남성이 재혼해야 하는지? 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을 해야 하는지? 등등의 결혼 (생활) 문제가 고린도교회의 중요한 이슈였다. (고전 7장) 우상숭배 (고전 8장; 10:1-22)와 조상 숭배의 이슈(10:23-11.1)가 성도들 사이에 양심문제로, 의견충돌 (contention) 문제로, 나아가 교회분열 (factions/schisms) 문제로 확대되었다.

 

03_다양한 이슈, 다양한 분열

바울의 사도직 (apostleship)을 의심하여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다. (고전 9장) 공동체 모임 가운데, 예언하고 기도할 때, 몇몇 여성도들의 단정치 못한 헤어스타일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전11:2~16)

또 성도들의 공동체 식사 펠로우십 (love feast)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일찍 도착한 몇몇 성도들이 모든 음식을 다 먹어버렸다. 자신들의 배만 채웠다. 너무 많이 먹고 마셔 과포화상태였지만, 나중에 도착한 성도들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쫄쫄 굶었다.

배려심 없고 비신사적인 행위를 일삼는 그들을 향해, 바울은 주께서 성만찬에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그들을 훈계했다. 먼저 온 사람들은 허겁지겁 먹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너무 허기진 사람들은 집에서 적당히 배를 채우고 오라고 권면했다. (고전 11:17-33)

몇몇 성도들은 그들이 가진 은사들 (spiritual gifts)이 다른 사람들의 은사들보다 더 가치 있고 질적으로 우세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가진 성도들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성도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제기되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이슈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단호히 말한다. “모든 은사는 교회 전체 공동체를 세우고 (upbuilding), 격려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가치 있다”고. (고전 12장, 14장)

고린도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거나, 완전히 부인하는 교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님 다시 오실 때 모든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이라는 가르침에 의문을 표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공동체와 별로 차이점이 없다. 이런 공동체 안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 (distrust), 시기심 (jealousy), 의심 (doubt), 다툼 (quarreling), 논쟁 (dispute), 분열 (factions)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로 여겨진다.

아, 교회 안에 결코 존재해서는 안될 이러한 모습들이 현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모습, 이대로의 교회는 치유될 희망이 결코 없단 말인가? (다음 호에 계속)

 

 

글 / 권오영 (철학박사· 알파크루시스대학교 한국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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