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여왕

어둠이 깔리는 뒷마당에 꽃 바람이 일렁인다. 길다란 잎에 매달려있던 꽃자루들이 위쪽으로 방향을 틀며, 관능적인 몸짓으로 개화를 시작한 것이다. 연 핑크 빛, 겉 봉오리가 살짝 벌어진 사이로 얼핏 보이는 하얀 속살에 수줍음이 가득하다. 공작 선인장과(科)인 이 꽃은 밤에만 꽃을 피우기에, 고전 판타지 소설에서나 묘사될 법한 ‘월하미인 (月下美人)’이라는 매혹적인 이름으로 불린다. 또한 그 아름다운 자태에 ‘밤의 여왕’, 또는 ‘밤의 공주’라고도 불리는 이 꽃과의 인연은 몇 해전에 동네 이웃을 통해서였다.

산책길에서 만난 낸시할머니가 정원을 보여 주겠다며 담장 너머에서 불렀다. 작은 보타닉 공원이 연상되는 그녀의 뜰은 온통 진기하고, 생소한 열대 식물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난 후, 기나긴 혼자만의 시간과 정열을 정원 가꾸기에 쏟아 부었다고. 구석구석 그녀의 손길이 느껴지는 그곳에서 나는 암갈색 작은 꽃대가 돋아난 ‘월하미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꽃의 실물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꽃은 한밤중에 피었다가 동이 트면 지는 ‘Queen of the Night’ 라는 꽃인데 정말 아름다워! 꽃 향기는 건강에 이로운 것은 물론이고,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 그래서 나는 이 꽃이 피는 밤이면, 설레었던 나의 첫사랑이 생각나곤 해..” 익살스런 낸시할머니의 설명에 퍼뜩, 전에 보았던 넷플릭스의 영화 ‘Crazy Rich Asians’가 떠올랐다.

영화는, 아시아를 주름잡는 싱가포르 재벌들의 이야기를 담은 내용으로, 최상위급 부호 가문의 수장격인 Grandma가 개화기를 맞은 ‘월하미인 파티’를 주최하는 장면이 -한창 파티가 무르익은 자정쯤, 초대 손님들은 안내에 따라 성곽 같은 저택의 한 장소로 이동한다. 그 방에서 위엄 가득한 Grandma의 신호에 커튼이 열리고. 커다란 꽃들이 향기를 내뿜고 있는, 두 개의 화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초대받은 부호들이 새하얗고, 귀티 나는 꽃의 기품과, 방안에 가득히 퍼지던 향내에 탄성을 지르던, 순박한 표정들이- 나의 뇌리에 오랜 잔상으로 남아있던 차였다.

그 영화로 인해, 신비한 그 꽃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이 증폭했던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자마자 바로 그 꽃이 영화에서 보여준 그 ‘월하미인’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내심 반가움과 설렘으로 가득 차 마치 오랜 숙제를 끝낸 듯, 개운했다.

며칠 후, 저녁에 낸시할머니가 급히 불렀다. 그녀는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꽃봉오리와 연결된, 기다랗고 납작한 잎을 떼어 건네주며. 침실에 두면 은은한 향속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밤 9시쯤 되자 봉오리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꽃봉오리는 커져갔고, 꽃이 벌어지는 크기에 따라 향내도 진해졌다. 밤 11시경에 절정을 이룬 새하얀 꽃 속에 연노랑의 꽃술 사이로 솟은 하얗고, 가느다란 수술의 특이한 모습은 가히 신비롭고도, 고고한 기품이 넘친다. 유리 화병에 담아 침대 머리맡에 올려 두었다. 달큼한 향기가 코끝에 감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예뻤던 순백의 꽃은 간 곳이 없고 -분홍색 두터운 겉잎에 쌓여- 굳게 닫혀진 꽃자루만이 무상함을 남긴 채, 목을 떨구고 축 늘어져 있었다.

그 후, 꽃이 진 잎을 뒷마당 귀퉁이에 꽂아 두었던 것이 뿌리를 내렸다. 장장 4년이 지난, 작년에는 드디어 꽃을 피우더니 (꽃이 진 다음 커다란 꽃자루가 늘어진 것을 보고 알았음), 올해는 어른 키만큼 자란 몸체에서, 자그마치 열다섯 송이나 주렁주렁 매달려 드디어 개화를 시작한 것이다.

지난번에는 오랜만에 피운 꽃대를 미처 발견치 못해 무심히 지나쳤던 아쉬움이 컸던 바, 올해는 작심을 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을 수선스럽게 들락거렸다.

꽃은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과감하게 피어나며 향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곧이어, 한 뼘이 넘는 크기의 ‘월하미인’ 열다섯 송이가 동화 속에서 보았던, 밤의 여왕과 잠자던 공주들이 막 깨어난 듯한 눈부신 자태로, 압도적인 한 밤의 무대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밤을 새워도 아깝지 않을 장관이었지만, 밤의 여왕이 초대한 -동트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에 열매를 맺게 도와줄- 곤충 손님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자 “밤의 공주님, 내년에 다시 만나요”라는 기약을 남기며 아쉬운 안녕을 고했다.

올해 열다섯 송이의 꽃대를 피운 ‘월하미인’ 옆에는 처음 얻어온 잎에서 돋아난 가지를 잘라 심은 삽목이 훌쩍 자라나, 나란히 심겨져 있다. 내년이면 5년차이니, 꽃을 피우지 않을까 싶어 나름 신경을 쓰고 있다. 두 그루에서,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꽃송이가 피어나 한밤의 뒷마당을 신비스런 세계에 잠기게 해줄지….

벌써부터, 내년 꽃필 무렵을 기다리는 기대와 설렘은 근래에 부쩍 ‘마음이 허허롭다’고 푸념하던 지인을 불러, 꽃 향의 맑은 기운을 같이 나누고, 도란거리는 소박한 향연을 내게 꿈꾸게 한다. 그런, 행복한 상상만으로도 나는 마냥 즐겁다.

게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 한 밤중 – 그 짧디 짧은 동안 – 고혹적인 향을 쏟아 내고는 이내 소멸해버리는 생주이멸 (生住異滅)의 무상 (無常)이 나는 좋을 뿐이다.

 

 

 

글 / 김경숙 (글무늬문학사랑회 회원·2022년재외동포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Previous article상표권
Next article탁주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