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다시
열심히 뛰어서 더 좋은 집 살 게…” “한국주택은행 4천 2백 73만원, 조흥은행 2천 3백 97만원, 한일은행 2천 9백 84만원, 한국외환은행 1천 4백만원, BC카드 7백 12만원, 국민카드 9백 55만원, 혜은 엄마 5백 50만원, 1208호 아줌마 2백만원, 무지개수퍼 17만 5천 8백 25원…” 단 한 군데라도 빠질세라 몇 번이나 확인 하고 또 확인 했습니다. 애지중지하던
신도시 32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이렇게 정산하고나니 남는 돈은 채 1천 4백만원이 안 됐습니다. 많이 허탈했습니다. 그토록 아끼고 모아서 산 우리집이었는데 이렇게 날아가버리다니…. 돌아서서 소리 없이 눈물을 닦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영은아, 미안해. 다시 열심히 뛰어서 더 좋은
집 살 게…” 2001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호주로의
‘맨주먹 이민’을 결정하자 우리는 곧바로 집 정리에 나섰습니다. 지인들은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어지간한
건 떼먹고 가라’고 했지만 아내와 저는 단 돈 1원도 남기지
않고 모든 빚을 깨끗히 갚았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심각하게 많은 빚’이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애정을 쏟았던 회사가 예기치 못한 부도를 맞고 무너져가는 과정에서 1년 6개월여 동안 월급 한 푼 안 받고 회사 살리기에 뛰어 들었던
탓이었습니다. 말이 1년 반이지 그동안의 생활은 말로는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은행이나 개인에게서 돈을 빌려 메꿔나갔지만 정말이지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습니다. 결국 회사는 침몰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보증 섰던 3천만 원 가까운
돈까지 떠안게 됐습니다. 이후 저는 다른 회사에서 연봉 7천만원을 받고 있었지만 눈덩이처럼 커져
나가는 빚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드니에 있는 한 교민매체에서 초청을 받았고 1주일의 고민 끝에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집을 팔아서 빚을 정리하고 1천 4백만원도
채 안 되는 돈을 들고 다섯 식구가 시드니행을 준비할 때의 절박함이란…. 하지만 ‘남의 가슴 아프게 하는 일’ 없이 모든 빚들을 갚았다는 사실은 ‘또 다른 편안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 주말, 문득 ‘화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드니에서 모발폰 대리점을 운영하다가 회사를
부도 처리한 후 얼마 전부터 부동산 컨설팅회사를 운영하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은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줬고, <코리아 타운>에도 3천 불이 넘는 손해를 입혔습니다. 그것도 연락 한 번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변호사 사무실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 들었습니다. ‘회사가 정리절차에 들어가니 받아야 할 돈이 있으면 신청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다시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당신에게 지급할 수 있는 돈은 한 푼도 없다’는…. 그러던 그 분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몇 달 전부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몇몇 교민매체에 커다랗게 컬러 광고를
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광고가 나왔고 그 분의 사진이 실린 기사까지도 눈에 띄었습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는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아니 직접 얘기하기가 어렵다면 편지 한 통이라도 보내는 마음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득 그 분이 ‘밉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 가족이 6년 반 전 한국을 떠날 때 단 돈 1원도
남기지 않고 빚을 다 갚고 떠난 건 정말이지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습니다. ********************************************************************** 김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