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도와줘! 내 친구… 돈 때문에 학교 짤린대…” 창가에 기대 하늘을 바라보는 초점 잃은 두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막막한 생각에 긴 한숨을 내쉬는데… 누군가가 살며시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태선아… 힘들지? 하지만 너무
절망하진 마.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겠지… 힘 내! 알았지?” 모두들 돌아간 텅 빈 교실에 친구 부현이가 혼자 남아
있었던 겁니다. 제가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가는 걸 보고는 걱정이 돼서 못 갔다고 했습니다. 1972년 가을,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3개월에 한 번씩 수업료를 내야
했는데,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저는 2기 분 즉, 6개월 치 수업료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그날 혼자 수업료를 미납하고 있는 저를 방과 후 교무실로 부르셨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어쩔 수 없으셨겠지만, 선생님은 그날 저에게 두 번째 ‘제적통고서’를 내미셨습니다. 더 이상은 기다려줄 수 없고 앞으로 1주일 안에 밀린 수업료를 모두 내지
않으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최후 통보였습니다. 하지만 1주일
안에 돈을 구하기란 정말 막막했고… 실의에 빠져 있는 저에게 그 친구가 위로와 용기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수업이 끝나고
그 친구가 “함께 갈 곳이 있다”며 제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데리고 간 곳은 서울 불광동 시장에서 옷 가게를 하는 자신의 이모네였습니다. 친구 이모는 “우리 부현이가 반에서 1등을
안 놓치는 좋은 친구가 수업료를 못 내 학교를 못 다니게 생겼다. 이모가 좀 도와 달라고 엄청 떼를
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 이모가 저에게 건네주신 봉투에는 제가 못 내고 있었던 2기분 수업료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돈은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상황이 될 때 갚으면 된다. 그리고 용기 잃지 말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그 친구 또한 집안이 넉넉지 못했던 터라 돈 때문에 학교를 못 다니게 된 저를 위해 무작정 이모한테 찾아가
사정을 했던 겁니다. 벌써 36년 전의 일입니다. 친구
이모가 도와주신 돈은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해서 몇 달 후 갚았고, 이후에도 저는 그 분을 친 이모처럼
대하며 지냈습니다. 부현이 그 친구도 우리 집이 자기 집인 양 드나 들었습니다. 우리 집에만 오면 돌아갈 생각을 안 해 “아예 양자로 들어가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밤을 새워
공부하며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와는 그 동안 단 한 차례도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습니다. 작년 연말 한국에 갔을 때,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 친구
부부와 술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10대의 까까머리였던 그 친구도 저도 이제는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잡힌 중년의 모습이 됐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고등학교
1학년인 우리는 그날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를 가끔 생각해봅니다. 아직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서 시작을 못 하고 있지만, 아내와 저의 계획
중 하나가 당시의 저처럼 돈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못 하는 학생들을 소리 없이 도와주는 일입니다. 월드비전을
통해 네 명의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도 그 같은 일을 위한 작은 움직임입니다.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을 항상 잊지 않으려 합니다. ********************************************************************** 김태선 1956년 생. <코리아 타운> 대표.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