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2

제목“전국에 계신 애청자 여러분!” #4442022-07-23 15:57

전국에 계신 애청자 여러분!”

 

어이쿠!” 꽈당!! 고개를 숙인 채 한 쪽으로 조심스레 비껴 가던 저는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길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습니다. 들고 있던 신문들이 온 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졌습니다.

 

지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신문들을 챙겨줬고 저는 아픈 것도 잊은 채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남기고는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사라졌습니다.

 

지나가던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화근(?)이었습니다. 2 50부 정도 되는 신문을 껴안고 길을 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스쳐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참 많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정작 그 친구들은 저한테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지나가고 있었지만, 사춘기 고등학생은 여학생들 앞에서 신문뭉치를 들고 가는 자체가 창피했던 겁니다.

 

제가 신문배달을 한 지역은 서울 은평구 갈현동, 일명 연신내라 불리는 동네였는데, 그곳에는 선일여고, 예일여고 등이 있어 제가 신문배달을 시작할 때면 수업을 마치고 몰려 나오는 여학생들과 으레 마주치게 돼 있었습니다.

 

한적한 주택가 집 앞에 도착해 벨을 누르면 안에서 누구세요?” 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야, 엄마!” 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여학생의 모습도 저에게는 또 다른 부러움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 때 6개월 남짓 신문 배달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친구 이모가 빌려주신 수업료를 갚기 위해서였는데, 신문배달을 더 오래 하지 못 했던 건 어쩔 수 없는 대학입시 준비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승부욕 같은 게 남달리 강한 저는 신문배달을 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잘 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 덕에 저는 6개월 여 동안 배달 부수 늘어나는 것도, 배달 사고 없는 것도, 수금 실적도 모두모두 1백 명쯤 되는 배달사원들 중에서 1등을 했습니다.

 

2 50백 곳이나 되는 구독자들의 집을 빠짐 없이 정확히 기억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신문배달이 시작 되기 며칠 전부터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을 이용해 동네를 돌면서 그림까지 그려 가며 구독자들을 일일이 기억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구독자 집을 머릿속에 담아둔 덕분에 제가 맡은 동네에서는 단 한 차례도 신문이 안 들어왔다는 컴플레인이 없었습니다.

 

수금은 배달 중간중간 하기도 했지만 배달이 끝나고 나서 또는 배달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 더 동네를 돌면서 했습니다. “신문 빠트리지 않고 꼬박꼬박 잘 넣어줘서 고맙다며 흔쾌히 신문 구독료를 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별 걸 다 갖고 승부근성 운운한다 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이든 이왕 하는 것 즐겁고 재미 있게 하자는 게 저의 신념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잘 할 수 있는데 그걸 게을리 한다는 건 참으로 억울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황인용 아나운서는 어릴 적부터 꿈이 아나운서였다고 합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집집마다 신문을 던져 넣으면서 전국에 계신 애청자 여러분!”을 큰 소리로 외치며 골목을 뛰어 다녔다고 했습니다.

 

신문 배달을 하며 힘들게 공부하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던 황인용씨는 결국 한국을 대표하는 아나운서가 됐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상황에서든 늘 최고를 꿈꾸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그 확률이 훨씬 높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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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선

1956년 생. <코리아 타운> 대표.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