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2

제목어떤 사직서… #4952022-07-23 16:35

어떤 사직서

 

편집장, 이거 다시 써와.”

싫습니다.”

사직서를 이런 식으로 쓰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제가 회사를 그만 두는 이유를 그대로 썼는데 뭐가 잘 못 됐습니까?”

 

1989 12 1일이었습니다. 사직서를 제출한 저에게 사장실에서 호출이 왔습니다.

 

몇 차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직서를 내버린 나이 어린 편집장이 건방지고 도전적이라고 느낀 사장은 불쾌감을 잔뜩 담아 저를 다그쳤습니다.

 

상기 본인은 회사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므로 1989 12 31일자로 회사를 그만 두고자 합니다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사장이 원하는 문구는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1989 12 31일자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저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이대로는 사직서를 처리해줄 수 없다는 사장에게 밀려(?) 제가 다시 제출한 사직서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사직서

성명: 김태선

소속 및 직위: 편집부 편집장

상기 본인은 회사의 발전과 본인의 발전을 위해 1989 12 31일자로 회사를 그만 두고자 합니다.

 

1989 12 1

김태선

 

50대 중반의 사장은 태선이 네 고집도 참 어지간하다. 그렇게 꼭 나를 이겨 먹어야겠냐?”라며 제 사직서에 결재도장을 찍었습니다.

 

솔직히 사장님께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전임사장에 대한 실망이 워낙 컸던 터라 혁신을 약속하며 취임한 사장님께 모든 직원들이 많은 기대를 걸고 11개월 동안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전임사장보다 더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 오셔서 나아진 게 뭐 있습니까? 사장님이 계신 한 비전 같은 건 절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 놈이…” 하며 사장은 노여움 반, 웃음 반의 멋쩍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저는 회사와 사장님에 대해 좋은 기억만 남겨두겠습니다. 밖에서도 회사와 사장님에 대해 좋은 얘기만 하겠습니다. 제가 5년 넘게 애정을 쏟은 제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사장님도 저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지고 좋은 말씀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언제 네 놈더러 나가라고 했냐? 나도 네 놈이 좋다. 어쨌든 그만 두기로 했으니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큰 경험 해봐라. 회사를 나가서도 많이 도와줘야 한다. 다시는 안 먹겠다고 우물에 침 뱉으면 꼭 그 물을 다시 먹게 되는 게 인생이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만나 기분 좋게 한 번 일 해보자.”

 

실제로 저는 회사를 그만 둔 후에도 짬짬이 그 사장을 도와줬고 10년 후 다시 만나서 1을 약속하고 함께 일을 했습니다.

 

사장님, 옛날보다 철 많이 드셨네요.” “아니, 이 놈이!” 그 해 연말, 한국 정부가 매년 시상하는 최우수 잡지상을 그 사장에게 안겨주고 저는 다시 제 길을 찾아 갔습니다. 어젯밤에는 문득 민윤식 사장 생각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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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 10 1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