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결혼은 했는데… 어땠을까요? 저한테 홀려서(?) ‘미친년’ 소리까지 들어가며 어린 나이에 덜컥 결혼이란 걸 하긴
했지만, 시작부터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남들은 집을 사서, 혹은 제법
그럴 듯한 전셋집 한 칸이라도 장만해서 출발하는데 반해 우리는 사글세 방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집 한 채만큼의 빚’까지
우리에게는 유산 아닌 유산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젊어서 혼자 된, 남자
같은 성격의 홀 시어머니 모시기도 어린 아내에게는 여러 가지로 벅차고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어머니
세대 특유의 ‘며느리는 왠지 미운 존재’라는 인식까지 더해져
아내는 사랑보다는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내는
지금도 가끔씩 결혼 초에 단 둘이서 신혼생활을 즐기지 못한 것을 많이 아쉬워합니다. 잠 자는 시간을
빼고는 늘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고,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난 첫 아이도 둘만의 달콤한 신혼 재미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을 겁니다. ‘결혼 후 최소 2, 3년 정도는
어른들이나 다른 식구, 아기에 의한 방해(?) 없이 단 둘이서
신혼 재미를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아내의 생각이고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달에 결혼하는 딸아이가 자기 집을 갖고 출발하는 것과
단 둘이서 신혼생활을 즐길 수 있음을 참 많이 다행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아쉬워하는 게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결혼식 비디오가 없습니다. 비디오 촬영이 막 일반화 되기
시작했지만 워낙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터라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비디오 촬영을 뺐던 겁니다. “그깟 결혼식 비디오 얼마나 자주 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비록 1년에 한 번도 채 안 본다 치더라도 그걸 안 갖고 있다는 사실은
왠지 모를 상실감으로 존재합니다. 2대 독자인 저는 결혼 후에도 줄곧 어머니를 모시고 한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북 출신인 어머니는 친척들이 모두 북한에 있어서 우리 집 외에는 달리 가 계실 데가 없었습니다. 마음 착한 아내는 그런 어머니를 20년
세월 동안 늘 친 엄마처럼 챙겨드렸습니다. 2004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한달 여 동안 아내는 어머니의
대소변을 모두 받아냈습니다. 장염으로 시작된 병환이었던 터라 어머니는 물만 드셔도 곧 바로 문제가 되곤
했습니다. 하루에도 아주 여러 번씩 말 없이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긴 했지만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어머니가 달라시는 대로
물이나 음식을 마음껏 드리지 못한 게 늘 죄스럽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은 금쪽같은(?)
외아들이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던 어머니들의 생각 때문에 아내와 부엌에서 아기자기한 재미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동안 못해왔던 것들을 조금씩 해주려 애써봅니다. 아내 또한 “라면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맛 있게 끓이는 것 같다”고 좋아하며 어쩌다가 제가 타주는 커피를 받아 들고 한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징그럽게도(?) 벌써 딸아이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실감도 안 나고 살짝 억울한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아내와 저는 지금 20년도 훨씬
전, 우리의 다소 억울했던(?) 신혼생활을 ‘리메이크’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시 태어나도 저와 결혼할 거라는 바보 같은 아내의 결혼기념일입니다. ********************************************************************** 김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