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의 대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새로운 풍경화의 패러다임 이룩한 독일의 대표적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년-1840년)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안개의 바다 위에 서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접했을 것이다. 그는 독일의 대표적 낭만주의 화가로 풍경화의 대가이다.

 

01_자연을 살아 숨쉬고 함께 느끼는 존재로

까마귀의 나무 1822년, 유화

그의 풍경화는 기존의 풍경화와는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시도로 “화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본 것도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앞에 있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며 자연의 풍광 속에 신비와 낭만적인 정취를 입혔다.

그는 자신의 풍경화 속에 새벽녘에 퍼지는 안개와 깊은 밤 고즈넉한 달빛, 노을 지는 들녘의 찬란한 색의 향연, 겨울의 쓸쓸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는 적막감과 고독, 차가운 우울감이 맴돌고 있고, 자연의 숭고함과 이를 마주하는 인간의 경외심이 표현되어 있다. 그는 풍경화를 그릴 때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바라보고 있는 자연에 강렬하고 깊은 인간의 감정을 덧입혔다.

이제 자연은 그저 그 자리에 서있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숨쉬고 함께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 새로운 풍경화의 패러다임을 이룩한 것이다.

 

02_내면의 소용돌이 감추고 명상하는 듯한 고요한 분위기는…

눈 덮인 오두막 1827년, 유화

프리드리히는 1774년 발트해 연안 포메라니아 지방의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양초 제조업을 했는데 독실한 루터 교도로 엄격하고 신실한 생활을 하는 집안이었다.

10남매중 6번째로 태어난 프리드리히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비롯해 형제자매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일곱 살에 어머니가 천연두로 돌아가시고, 곧 한 누이도 세상을 떠났다. 13세에는 동생과 같이 스케이트를 타던 중 동생이 얼음에 빠져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 사건은 어린 그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주어 대인기피증과 자살충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후에 또 다른 누이가 티부스로 죽자 그의 주변은 온통 죽음의 그림자에 뒤덮여 버렸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상실감은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쳐 우울하고 고독한 성향을 띠게 되었고 자신의 내면 속으로 점점 침잠해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감추고 명상하는 듯한 고요한 분위기는 이러한 유년 시절의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03_독일과 북구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 속속들이 표현

달을 바라보는 두 남자 1830년, 유화

1790년 미술공부를 시작한 그는 1794년 코펜하겐으로 가 덴마크 왕립미술관에서 4년간 수학을 해 본격적인 미술가로서의 기초를 쌓았는데, 이 시기에 얀 반 에이크, 루벤스등  네델란드 지역 플랑드르 파의 풍경화를 많이 접하고 그들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그는 독일 북부지역을 비롯해 많은 곳을 여행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실력을 쌓아갔다. 이때의 경험은 후에 그의 작품 제작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는 졸업 후인 1798년 드리스덴으로 거처를 옮겨 목판, 에칭 등 판화의 작업방식을 연구하고, 수채화나 잉크를 이용한 작업을 하며 재료의 다양성을 꾀했다.

그는 많은 여행을 하며 영감을 얻고, 특히 독일의 자연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묘사해, 독일과 북구의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자연을 속속들이 표현해냈다.

그는 1805년 독일의 문호 궤테가 진행한 바이마르 예술협회 공모전에서 수상함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810년 열린 베를린 아카데미에 출품한 ‘바닷가의 수도승’과 ‘오크우드의 수도원’을 빌헤름 황태자가 구입하자 그의 명성은 점점 커졌다. 그 해 프리드리히는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고, 1816년에는 드리스덴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04_광대한 자연과 그 앞에 선 작은 인간의 존재 표현

뤼겐 섬의 하얀 절벽 1818년, 유화

아마도 ‘바닷가의 수도승’ (1808년-1810년)처럼 광대한 자연과 그 앞에 선 작은 인간의 존재를 잘 표현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 작품은 화가가 자주 그림을 그리러 찾았던 루겐 섬의 풍경이다.

화면은 온통 자연으로 꽉 차있다. 하늘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끝간 데 없이 구름을 피워 올리고 있다. 밑에는 거뭇한 선으로 표현된 바다가 펼쳐지고 모래사장 위에는 조그만 인영이 서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안보면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미미한 존재감이지만 그는 수도승의 모습으로 거기에 서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거대한 자연의 위용에 짓눌린 두려움일까? 가늠할 수 없는 위대한 힘에 대한 경외와 찬탄일까?

낮에서 밤으로 옮겨가며 태양이 사라져가는 때의 모호하고도 장엄한 순간… 위대한 자연의 순환 앞에 마주한 수도승의 머리 위로 머물렀던 짙은 구름은 저 푸른 하늘을 향해 퍼져 나가고, 수도승의 경외심도 그와 함께 퍼져나가는 것 같다.

 

05_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묘지 입구 1825년, 유화

1818년 제작된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인간에게 내재된 감성을 끌어올린다는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프리드리히 작품뿐만 아니라 모든 낭만주의 작품 중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바위로 뒤덮인 산 정상 위에 어두운 색의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한 남자가 등을 보이고 서있다. 바위 위로 한 발을 내디딘 채 아래로 펼쳐진 안개 속의 풍경을 내려다 보는 그의 머리칼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이 작품이 주목을 끄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는 모두가 사람의 앞모습을 그릴 때 과감하게 사람의 뒷모습을 그림으로 그 인물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했다는 점일 것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람의 뒷모습을 그리게 하였을까? 방랑하는 자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화가의 지나온 세월과 험난한 여정을 느끼게 된다.

무채색에 가까운 절제된 색감과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은 과감한 생략으로 마치 바다에 떠있는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대자연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내는 웅장하고도 섬세한 감성의 오케스트라가 들리는 듯하다.

안개의 바다에 잠겨 드문드문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들과 그 위에 자라난 나무들이 이 몽환적인 분위기에 현실감을 끌어들여 이곳이 안개 자욱한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 사람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광활한 자연의 신비인가? 그 장관 앞에서 오히려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인가? 참으로 많은 생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프리드리히가 작센과 보헤미아의 엘브잔트슈타인게베르게 산맥을 여행했을 때 그 자연의 위용에 영감을 받아 스케치한 것을 후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유화로 완성했다. 이 작품은 후대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사진, 영화, 디자인 등 여러 부문에서 수많은 패러디와 오마주로 제작되어 현재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06_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연의 광폭한 힘

바닷가의 수도승 1810년, 유화

‘뤼겐 섬의 하얀 절벽’은 프리드리히의 풍경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비현실적으로 하얀 절벽이 삐죽삐죽 솟아있고 그 사이에는 저 멀리 보이는 바다 위로 조그만 배들이 떠다니고 있다.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는 모호하고 파스텔 톤으로 그라데이션된 색채가 아름답다.

이 작품은 1818년 결혼한 프리드리히가 뤼겐 섬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그린 작품이다. 산 위에는 세 사람이 있는데, 붉은 옷을 입은 신부는 그를 향해 팔을 내밀고 있고, 젊은 남자는 팔짱을 끼고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노인이 힘에 겨운 듯 모자와 지팡이를 내던진 채 엎드려 있다. 젊은이와 노인은 모두 프리드리히로, 젊은 날의 이상화된 그와 세월이 지나 노인의 모습이 된 자신을 한 화면에 그림으로 인생의 흐름을 표현했다. 좌우의 울창한 나무와 희게 솟은 절벽들이 가운데 공간에 펼쳐지는 아스라한 색들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고 신비한 세계를 창조하였다.

삐죽삐죽 솟아난 얼음들 사이사이로 부서진 배의 잔해가 보인다. 차가운 하늘 아래 펼쳐진 설원이 북극의 황량함을 더하고 인간이 발 디디기를 거부하는 듯 얼음의 바다는 선박을 집어삼키고 있다.

아마도 어린 시절 동생을 집어삼킨 얼음의 공포가 녹아있을 이 작품에서 화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삐죽삐죽한 얼음의 침범과 생명을 잃어가는 배의 종말을 표현한다.

1824년 그려진 ‘북극해’에서 우리는 생명을 거부하는 적막과 쓸쓸함, 그리고 화면 전체에 퍼져나가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연의 광폭한 힘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시대에서 볼 수 없는 과감한 구도와 주제로 프리드리히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죽고 나서 한참이 지난 1905년이 되어서야 그 진가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07_아늑하고 고요한 달밤과 어우러져 충만한 행복감을

북극해 1824년, 유화

‘달을 바라보는 두 남자’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 작품에서 원제는 달을 바라보며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깊이 사색을 한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언덕 위에 오른 두 남자는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양쪽에는 거대한 고목이 달빛을 받고 신비로운 형태를 뽐내고 있다. 두 남자의 뒷모습은 우리에게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친근하게 기대어 많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아늑하고 고요한 달밤과 어우러져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오른쪽 남자는 프리드리히 이고 왼쪽 남자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오거스트 하이힌리이다.

그는 1822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서 프리드리히는 매우 슬퍼하며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는 이 주제로 3점의 연작을 그렸는데, 첫 번째 작품은 오거스트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819년에, 두 번째 작품은 1824년에 그려졌고, 마지막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1830년경에 그려졌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애도하는 화가의 심경이 느껴지는 것 같다.

 

08_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인생과 세월에 대한 화가의 깊은 철학을

삶의 단계 1834년, 유화

프리드리히가 60이 넘어 그린 ‘삶의 단계’ (1834년)는 그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느낀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통찰과 관조가 녹아있는 작품이다. 저 멀리 바다 위에는 다섯 척의 배가 떠있고 해변가 둔덕에는 남녀노소 다섯이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그들은 가족으로 보이는데, 왼쪽의 지팡이를 짚고 아이들을 향해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은 프리드리히 자신이라고 한다. 가운데 중절모를 쓴 남자가 보이고, 스웨덴 국기를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들과 젊은 여인이 보인다.

이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그림은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인생과 세월에 대한 화가의 깊은 철학을 느낄 수 있다. 바다에 떠있는 5척의 배들과 해변가의 5명의 사람들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이들로 표현되는 유년기에서 프리드리히로 표현되는 노년기로 이르는 모든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바다의 배들은 그들 각자를 싣고 인생의 여정을 떠나는 하나의 장치이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정해놓고 인생의 항해를 헤쳐나가는 우리 모두의 세월이 이 작품에 녹아있다. 작품의 배경은 화가의 고향인 그라이프스발트의 항구이지만 실재하는 항구를 그렸다기 보다는 화가가 그 동안 보고 느꼈던 추상적인 장소의 이미지를 구현했다고 보여진다. 그의 지나온 인생을 품고 있는 이 바닷가에서 우리는 수평선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인생의 덧없음을 느낄 수 밖에 없다.

 

09_그가 죽은 지 66년후 1906년에 그의 재발견이

창문 밖을 보는 여인 1822년, 유화

세월이 지나자 밀려오는 사실주의 운동이 인간의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낭만주의를 밀어내고 미술계의 주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가는 낭만주의 사조처럼 프리드리히도 점점 잊혀져 갔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66년후 1906년에 그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 그의 회화와 조각을 전시한 베를린에서 그의 가치는 재평가되었고, 그는 북유럽의 정서와 낭만주의를 가장 잘 구현한 화가로 인정 받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수난이 시작되었다.

그의 비극은 나찌의 ‘피와 흙’이라는 국수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1930년대 히틀러와 나찌는 예술은 피와 흙으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며, 독일의 풍광을 그린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를 그들의 이념적 상징으로 삼았다.

풍경화를 통해 종교적 숭고함과 내면의 관조, 보다 깊은 자아의 성찰을 추구했던 프리드리히의 예술적 사상과는 분명히 어긋난 러브콜이었지만, 그들의 일방적인 구애는 이후 나찌가 세계의 공적으로 드러났을 때 화가의 입지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본의 아니게 나찌의 부역 화가처럼 몰린 그의 작품들은 오랜 시간 미술관 창고에 갇힌 채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1970년이 되어서야 또다시 프리드리히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독일 낭만주의 화가의 최고봉이라는 명예를 획득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켜 현재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0_그의 작품과 닮은 ‘겨울 나그네’

해변의 월출 1822년, 유화

슈만은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처음 듣는 순간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를 노래한 것 같다는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화가의 작품과 닮은 ‘겨울 나그네’ 중 제1곡 ‘좋은 밤’을 그의 찬란하고 고독했던 영혼에 바치고 싶다.

 

‘좋은 밤’

이방인으로 왔다가

다시 이방인으로 나는 떠난다.

5월은 내게 친절하였네

피어 만발한 꽃으로.

그녀는 사랑을 속삭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까지 약속했건만,

이제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차고,

길은 눈으로 덮였네.

 

난 내 여행을

떠날 때를 정할 수 없지만;

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하네

이 어둠 속에서.

달빛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함께

그를 벗삼아 떠나리

짐승의 발자국을 따르리

이 하얀 벌판에서.

 

* 다음에는 아름다운 색채와 자유로운 선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한 야수파 화가 라울 뒤피와 만나보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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