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파의 창시자 조르주 브라크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사조 창조, 현대 추상미술의 모태 역할

입체파의 창시자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1882년-1963년)는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라는 개념을 창조하고 발전시켜 현대회화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한 위대한 화가이다. 야수주의에서 시작해 입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주옥 같은 작품들로 우리를 감동시킨 화가 브라크, 그가 창조한 입체주의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사조가 되었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현대 추상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01_냉철한 이성과 예술적 열정 조화시켜 독자적 입체주의 완성

검은 새, 1961년, 유화

그는 자유분방한 피카소보다 대중적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지적이고 냉철한 이성과 예술적 열정을 잘 조화시켜 독자적인 입체주의의 완성을 이루었다.

또한 작품에 신문이나 벽지 등을 붙인 파피에 콜레라는 기법을 발명하고, 물감에 모래를 섞어 질감을 부각시키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회화의 표현 방식을 확장시켰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브라크는 현대예술의 모든 새로운 점들을 새롭게 검증했고, 수술했으며, 계속적으로 검사관의 장인의식에서 철저하게 다시 조립한 예술가”라고 평한 것처럼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긋고, 커다란 족적을 남긴 화가이다.

 

02_초기 작품들은 야수파의 생생한 색채들로 가득

과일접시와 컵, 1912년, 파피에 콜레

브라크는 1882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대로 건물과 실내의 장식업과 가구 수리를 하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아마츄어 화가인 예술적 환경에서 자라난 브라크는8세에 르아브르로 이사해 그곳에서 공립학교를 다니며 권투나 플루트 연주 등 취미생활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세부터 17세까지 르아브르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후, 브라크는 견습생으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실내장식을 배웠는데, 이때의 경험은 후에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여러 기법들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파리의 사설 아카데미와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하며, 여느 화가들과 같이 루브르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들을 연구하며,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그림을 시작할 때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1905년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을 접한 후 야수파의 길을 택했다.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들은 야수파의 생생한 색채들로 가득 차있다.

 

03_화려하고 아름다운 색들로 채워져

기타와 프로그램, 1913년, 파피에 콜레

1906년작 ‘앤트워프 근처 풍경’은 브라크의 야수파 시절 대표작으로 불린다. 그가 벨기에를 여행할 때 유럽에서 가장 큰 항구인 앤트워프 항구를 보고 매료되어, 드로잉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캔바스에 그려낸 작품이다. 브라크는 이곳에서 자신이 느낀 감성 즉, 자신이 자라난 고향 르아브르를 연상시키는 친숙함과 이국적인 매력을 동시에 표현하려고 했다.

아름답고 선명한 색상들이 자유분방한 붓터치로 화면 전체에 퍼져있어 밝고도 경쾌한 항구의 모습을 나타내고, 몇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윤곽선 역시 화려한 색상들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어떠한 풍경의 형태보다는 아름다운 색채의 율동을 느끼게 된다.

그는 또한 에스타크와 라 시오타의 풍경을 여러점 제작했는데 ‘에스타크’, ‘에스타크 근교의 올리브나무’, ‘라 시오타의 항구’, ‘라 시오타의 풍경’ 등 수많은 걸작들을 그렸다. 1906년에서 1907년 사이 그려진 그의 풍경화들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들로 채워져 있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중에서 특히 ‘에스타크 근교의 올리브 나무’는 2010년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에서 도둑맞은 고가의 작품으로 현상금이 걸려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04_칸바일러와 작품 판매계약,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

라 시오타의 풍경, 1907년, 유화

1906년 세잔이 세상을 떠나자, 1907년 살롱 도톤느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세잔 회고전을 열었는데, 세잔의 화풍에 새로운 것을 찾는 많은 젊은 화가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고, 브라크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큐비즘은 폴 세잔의 ‘자연은 원통과 구, 원뿔로 나뉜다’는 사상에서 출발한다. 세잔은 인상주의가 뭉개놓은 형태를 이러한 기하학적 관점으로 견고하게 돌려놓으려 했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온 원근법에서 벗어나 사물들을 각각 다른 시점으로 표현했다. 세잔이 없었다면 입체파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잔이 입체파의 모태가 된 것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라 시오타의 풍경’은 야수파의 색채와 세잔의 견고한 구성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나무와 숲, 언덕은 둥글둥글한 원형으로 그려져 있고, 멀리 보이는 집은 몇개의 선과 색면으로 처리되어 있다. 화면 전체에 퍼져있는 노랑과 주홍, 녹색의 하모니가 단순한 형태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숲의 정경을 노래한다.

1907년 앙데팡당전에 ‘라 시오타의 풍경’ 등 6점을 출품한 브라크는 작품이 모두 완판되는 쾌거를 이루어 전도유망한 신인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브라크는 자신을 눈여겨보던 미술평론가이자 화상인 칸바일러와 작품 판매계약을 맺고, 그를 통해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도 하게 되었다.

 

05_마담 피카소라 불리기도

바이올린과 팔레트, 1909년, 유화

1907년 시인이자 평론가인 아폴리네르를 통해 브라크와 피카소의 만남이 이루어진 후, 브라크와 피카소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그들은 몽마르트에서 거의 매일 만나 예술을 논했는데, 이 젊은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예술과 사상은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브라크를 마담 피카소라 부르기도 했다. 브라크는 훗날 자신과 피카소의 관계를  “마치 로프를 서로의 몸에 묶고 의지해 절벽을 오르는 사람들 같았다”고 말했는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헤매며 개척해 나가야만 했던 당시의 심경이 잘 표현된 것 같다.

종교가 세상을 지배할 때 인본주의를 내걸고 예술을 꽃피운 르네상스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문화혁명으로 불리는 것처럼, 수백 년을 내려온 사실주의의 틀을 깨고 형태의 본질을 추구하는 입체주의의 출현 역시 르네상스 이래 가장 큰 시각예술의 혁명으로 평가된다.

브라크와 피카소로 인해 회화는 자연과 사물의 모방에서 벗어나, 대상의 형태, 공간, 시점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의 새로운 사조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큐비즘이라는 명칭은 1908년 브라크가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작품을 본 마티스가 입방체 (큐빅)가 가득한 작품이라는 말을 한데서 비롯되었고,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큐비즘 (입체주의)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에스타크의 집’은 1908년 브라크가 처음으로 풍경을 입체주의 화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는 다채로운 자연의 색채를 극도로 절제해 갈색과 녹색 계열의 색채로만 표현해서, 보다 더 자연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형태에 집중하려고 했다. 한두 해 전에 그려진 화려한 색감의 화풍은 자취를 찾을 수 없고, 오로지 형태에만 매달린 그의 노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바다나 하늘같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물체만이 자신의 존재감으로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집들은 모두 입방면체로 그려져 있고 큐브 하나하나는 각 방향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그가 세잔의 다시점적 표현을 재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무들 역시 원통이나 원뿔 모양으로 그려져, 이 풍경에 등장하는 모든 물체는 단순화된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된다. 두텁게 칠해진 질감으로 형태의 견고성을 나타내고 극도로 단순화시킨 형태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 분석적 큐비즘의 시초가 된 작품이다.

 

06_초기 입체파 시절, 해마다 장소 옮겨가며 작업

붉은 원탁, 1952년, 유화

다음해인 1909년 제작된 ‘바이올린과 팔레트’를 보면, 화면에서 공간과 사물은 각자의 질감을 가지고 합체되어 무엇이 공간이고 무엇이 물체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윗부분의 팔레트나 아래쪽의 형태가 해체된 바이올린의 잔해, 그리고 중간부분의 악보를 인식할 수 있어, 이 작품이 추상으로 가기 전단계인 구상과 반추상의 경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극도로 절제된 브라운과 그린계열의 색상 속에서 사물의 본질은 더욱 투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대상의 본질을 분석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분할된 면들이 기존 서양화의 형식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파괴 속에서 재창조된 물체의 질서가 화면을 채운다. 이 작품에서 브라크는 팔레트가 걸린 못의 그림자까지도 묘사하는 세심함으로 물체 자체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초기 입체파 시절 브라크는 해마다 장소를 옮겨가며 작업을 하였다. 1909년에는 센강 유역의 라로스기용에서, 1910년에는 레스타크, 또1911년엔 피레네 산맥 근처의 세레에서 작업을 하던 브라크는 1912년 마르셀 라프레와 결혼해 아비뇽 근처의 작은 도시 소로스에 정착했다.

 

07_‘파피에 콜레’ 기법 창시

악사들, 1918년, 유화

1912년작 ‘과일접시와 컵’에서 브라크는 캔버스에 나무결 무늬의 벽지를 붙여 과일접시와 컵이 놓여있는 나무 테이블을 상징했다. 그리고 장소를 나타내기 위해  ‘BAR’라는 알파벳을 목탄으로 써넣었다. 그 당시 이러한 시도는 획기적인 실험으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캔버스에 인쇄된 종이를 붙이거나, 실물을 글자로 대체하는 생각조차도 못한 시기였다.

그는 신문, 잡지, 광고 등 이미 인쇄되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종이들을 화면에 붙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파피에 콜레’라는 기법을 창시했다. 그래서 몇개의 직선과 곡선으로 표현된 접시와 과일, 컵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종합적 입체주의의 시초이자 위대한 혁신의 발현작이라는 중대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1913년작 ‘기타와 프로그램’은 종이 위에 목탄과 과슈로 색을 입히고 팜플렛을 붙인 파피에 콜레 작품이다. 중앙부분의 기타를 감싸고 있는 브라운 계열 직사각형의 형태들과 목탄 스케치의 알파벳 배경에 당당히 자리잡은 음악회 팜플렛이 작품의 구체성을 높이고 있다.

브라크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입체주의의 탄생을 이룬 것처럼 피카소도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는다.

피카소는 곧이어 ‘바이올린’이라는 작품에서 화면에 신문을 붙이고 조각난 바이올린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 뒤를 따랐는데, 그는 바이올린의 몸체와 공간에 동시에 신문을 붙여, 한 오브제가 이중적 의미를 가지게 함으로 브라크의 파피에 꼴레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또한 인쇄된 종이뿐만 아니라 나무조각, 쇳조각 등 일상에 흔히 등장하는 물체들을 화면에 붙여 의미를 부여하는 콜라주라는 기법을 탄생시켰다.

 

08_음악 떠나서는 살 수 없었던

앤트워프 근처 풍경, 1906년, 유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로를 이끌던 브라크와 피카소의 관계도 브라크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자연스레 멀어졌다. 훈장을 두 번이나 탈 정도로 용감한 군인이었던 브라크는 군복무중 머리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집으로 돌아가 요양을 하게 되었다. 몸이 불편한 중에도 그의 예술적인 열정은 식지 않았다.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향해 탐구하며 자신만의 입체주의적 화풍을 완성해 나갔다.

‘악사들’ (1918년)은 세로 2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형태의 분석에 치중하느라 색채의 다양성을 포기했던 초기 작품들과 달리 빨강, 파랑의 원색과 검정과 흰색의 강렬한 콘트라스트로 이루어진 유화 작품이다. 화려한 색면들의 조합 속에 드문드문 그려진 구체적 사실성을 띈 사물의 부분들이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브라크는 음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할 만큼 음악을 사랑해 바이올린이나 기타 등 음악적 요소를 주제로 많은 작품들을 그렸다. 실제로도 그는 음악에 재질이 뛰어나 높은 수준의 실력을 자랑했고 노래와 연주를 즐겨 했다고 한다.

 

09_1920년대부터 유명하고 부유한, 성공한 예술가 반열에

에스타크 근교의 올리브 나무, 1906년, 유화

1920년대부터 브라크는 유명하고도 부유한, 성공한 예술가의 반열에 들었다. 그는 몽마르트의 화실을 몽파르나스로 옮겨 작업을 계속해 나갔는데, 1923년과 1925년 러시아 발레단 무대세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인내심’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제작된 걸작이다.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당했을 때 브라크는 파리 자신의 화실에 몇 달 간 고립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그려진 작품으로 화가의 내면세계를 잘 드러낸 작품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제작된 다른 작품들처럼 이 작품도 질식할 것 같이 숨막히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각진 기하학적 입체들은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변화해 복잡하고도 기묘한 실내 풍경을 묘사한다.

권태로운 여인의 표정에서, 하루하루 방안에 갇혀 지루한 일상을 견뎌야 하는 인내심이 떠돈다.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 카드를 만지고 있는 여인의 한쪽 손은 검은색으로 마치 전쟁의 시커먼 마수와도 같아 보인다. 여인은 밝은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화가 자신의 내면 속 암울함과 일상에 드러난 객관적인 모습과의 괴리를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952년작 ‘붉은 원탁’은 아름다운 색의 조화와 곡선과 직선의 절묘한 배합으로 이루어진 걸작이다. 2차대전중 보여지던 어둡고 침중한 색상은 보다 경쾌하고 밝게 변화해 그의 심경의 변화를 보여준다.

화면 상단의 배경에는 빨강과 검정, 녹색등 짙은 원색계열의 색들이 긴 직사각형으로 늘어서 있고, 아래에는 갈색 나무결 무늬의 가구가 흰색 라인으로 구분 지어져 있어, 자칫 복잡할 수 있는 색채의 나열을 안정감 있게 받쳐주고 있다. 또한 원탁을 받치고 있는 다리의 곡선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배경 속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화면 중심부에 자리잡은 둥근 원탁 위에는 물병과 접시 음식들이 놓여져 있다. 브라크는 둥근 테이블을 소재로 여러 점의 작품들을 그렸는데, 그에게 있어 원탁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아마도 둥근 형태에서 보여지는 화합과 안정감, 그리고 음식이 주는 풍만함이 가족과의 단란한 일상을 나타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0_생존 화가로는 최초로 루브르박물관에 작품 걸려

에스타크의 집, 1907년, 유화

그는 평생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주제를 탐구하고, 자신의 작품이 감정에 휘둘리는 대신 이성을 가지고 규칙에 따라 형태를 구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기하학적 형태가 빼곡히 들어차있는 화면을 보다 유연하고 추상적인 형태들로 변화시켜 나갔다.

1961년작 ‘검은 새’는 이러한 변화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말년에 여러 점 제작한 새 시리즈 중 한 작품이다. 회색 빛 하늘에 노랑색 나무 위로 한 마리의 검은 새가 날고 있는 이 그림에서, 보다 자유로운 붓터치, 압축되어 추상화되었지만 부드러운 선을 유지하고 있는 형태들은, 그가 일생 동안 추구해왔던 예술에 대한 개념이 무르익어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게 해준다.

브라크는 계속 회화작업을 하면서 많은 일러스트와 프린트를 제작하고, 자신의 그림을 모티브로 조각을 하거나, 고대 그리스에서 영감을 얻은 보석 장신구를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1937년에는 ‘노란 테이블보’로 카네기상을 받았고, 1961년에는 살아있는 화가로서는 최초로 루브르박물관에 작품이 걸리는 영광을 차지했다. 많은 화랑과 미술관이 그의 초대전을 열었고, 노화가는 1963년 파리에서 생을 마쳤다.

평생 동안 넘쳐나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원 없이 풀고 간 대화가의 일생이 존경스럽다.

 

* 다음 호에서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고통과 환상과 현실의 파노라마를 만나겠습니다.

 

 

미셸 유의 미술칼럼 (27)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적 원시회화 창조한 앙리 루소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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