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감정을 근육에 새긴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

조각을 시각예술의 독자적 분야로 끌어올린 현대조각의 아버지

현대 조각의 시조이며 미켈란젤로 이후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불리는 오귀스트 로댕 (Francois-Auguste-Rene Rodin, 1840~1919)은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들 등의 위대한 작품을 제작한,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프랑스 조각가이다.

 

01_모든 열정 바쳐 이뤄낸 ‘지옥의 문’은 로댕의 전부

건축물의 장식이나 회화의 종속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조각을 회화와 대등한, 시각예술의 독자적인 분야로 끌어올린 로댕.

그는 외적으로 완벽한 비율을 중요시하는 황금율로 육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미켈란젤로의 인체조각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소리를 근육 하나하나에 새겨 넣었고,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는 현대 조각의 모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상화된 미의 세계에 불쑥 살아있는 사람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인체의 표현으로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그의 작품세계는 조각의 역사에 크게 한 획을 그어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는 미술사적 쾌거를 이루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인간 자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다양하고도 격렬한 감정과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다. 특히 20여년에 걸쳐 제작하고도 완성을 할 수 없었던 ‘지옥의 문’은 인간들의 고통과 사랑과 번뇌를 총 집약한 작품이다.

로댕은 “나는 배치, 움직임, 구성에 관한 한 내 자신의 감각과 상상력을 따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즐거움의 문제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정해진 어떤 계획이 없이 자발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계속 변화를 준 ‘지옥의 문’은 수십 년에 걸쳐 끊임없이 자신을 창작의 고통과 희열 속으로 몰아넣으며 모든 열정을 바쳐 이루어낸, 로댕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02_동물조각가 앙투안 루이 바리에게서 수업

로댕은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경찰청 직원이었고 소박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 정신적 발육이 더디었던 로댕은 신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지만 읽기와 쓰기도 잘 하지 못할 정도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자, 부모는 그를 보베의 기숙학교에 보내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가뜩이나 소극적이고 어눌했던 로댕은 이 훈련소 같은 기숙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점점 움츠려 들었다. 그의 예민한 감수성은 커다란 상처를 입었지만 홀로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이 시기를 견뎌냈고, 그의 피난처가 된 그림에서 로댕은 재능을 나타냈다.

자식을 공무원으로 키우려던 부모의 꿈이 그의 학습능력으로 불가능해지자, 그들은 로댕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지원을 해 로댕은 14세부터 17세까지 미술과 수학을 가르치는 쁘띠에콜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했다.

졸업 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기 위해 동료를 모델로 한 작품을 내었지만 매번 떨어지고 입학을 거부당한 로댕은 좌절에 빠졌지만, 이후 조각가의 조수를 지나며 장식품과 건축 장식을 만드는 장인으로 살았다.

1862년 누이 마리아가 수도원에서 복막염으로 세상을 등지자 로댕은 카톨릭에 귀의해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당시 카톨릭교회 사제였던 신부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다시 조각을 하도록 격려하였다. 하마터면 사장될 뻔했던 위대한 조각가의 재능이 다시 제 길을 찾는 순간이었다.

그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 장식품을 조각하며 동물조각가 앙투안 루이 바리에게서 움직이는 동물의 근육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수업을 들었는데, 이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쳐 후에 인체의 근육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03_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 작품 감명… 독창적 작품세계 추구

1864년 로댕은 평생의 인연이 된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도 낳았지만 그녀에게 큰 사랑은 없었던 것 같다. 그녀를 모델로 한 여러 작품을 만들기도 하며 로즈를 연인보다는 모델로 대했던 로댕은 그녀와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에게 자신의 성도 붙여주지 않은 채 평생을 지냈다.

아마도 세탁부 출신의 여성으로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고 예술적 소양도 없는 그녀가 그에게는 그저 편리한 가정부 겸 모델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로댕의 태도는 로즈에게 큰 상처가 되었지만 로댕을 사랑했던 그녀는 모든 것을 감내하고 묵묵히 그의 곁에 머물렀고, 죽음에 임박해서야 로댕의 결혼신고로 정식부인이 될 수 있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나고 로댕은 징집되었지만 약시로 인해 1년 만에 제대했다. 전쟁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일감이 없었던 로댕은 로즈와 아들을 남겨둔 채 돈을 벌기 위해 브루셀로 떠났다.

그곳에서 건물장식을 조각하는 일로 돈을 모은 로댕은 1875년 피렌체, 로마, 나폴리 등을 여행하였는데, 이때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의 작품을 접하고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여행 후 로댕은 이전에 살롱전에 출품했다 낙선한 ‘코가 부러진 남자’를 수정해서 살롱전에 출품해 입선했다.

이 작품은 코뼈가 부러진 늙고 못생긴 남자의 얼굴인데, 아름답고 고상한 것만을 추구하던 당시의 예술 풍조에서 보면 파격적인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좌우의 얼굴이 비대칭으로 이루어져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얼굴로 고통을 호소하는 듯, 그 사람 자체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04_‘청동시대’는 그의 작품관 드러내는 최초의 작품

1877년 제작된 ‘청동시대’는 그의 작품관을 드러내는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 보여지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육체미나 미로의 비너스 상에서처럼 육체의 풍만함으로 여성성을 극대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어떠한 과장이나 미화 없이 극사실적으로 표현했을 뿐인데, 거기에는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 있다. 이 진솔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작품에서 우리는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삶의 고뇌와 희열을 간직한 한 인간 자체를 만나게 된다.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이러한 표현 방식은 비평가들과 세간의 몰이해로 사람의 몸 위에 주물을 부어 직접 주조했다는 어이없는 루머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이제 그의 시대는 시작이었다.

1879년 파리 시청의 조각상 ‘설교하는 세례요한’으로 이전의 작품들까지 인정받게 된 로댕에게 파리 장식 미술관의 청동문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지옥의 문’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로댕은 인간의 모든 감정과 정념을 표현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20여년에 걸쳐 ‘지옥의 문’에 매달렸으며, 이것은 그에게 있어 인간의 인체에 대한 사실적 묘사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체의 근육과 포즈, 표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하고 표현하는 거대한 실험체였다.

 

05_단테의 <신곡>중 지옥편 모티브로 ‘지옥의 문’ 조각

‘지옥의 문’은 세로 635cm, 가로 400cm, 너비 85cm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문인데, 약 180여점의 환조 (대상을 3차원 성으로 구성하여 여러 방향에서 볼 수 있고, 그 주위를 돌아가며 만져볼 수 있게 한 입체표현의 조각)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는 작품이다.

점토로 작게 제작된 186개의 작은 조각상들을 다시 석고로 여러번 변형과 수정을 걸쳐 제작했으며 그 중 생각하는 사람, 키스, 세 망령 등 여러 작품들이 크기를 키워 독립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선보였다.

단테의 오랜 신봉자로 항상 그의 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였던 로댕은 단테의 <신곡>중 지옥편을 모티브로 ‘지옥의 문’을 조각하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사랑과 고통, 탄생과 죽음 등 격렬하고도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구성과 모델을 변경하며 <신곡> 속에 숨어있는 참된 의미를 찾아 그것을 작품 속에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지옥 편에 나오는 8개의 원을 그리면서 단테와 꼬박 1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 해가 저물 무렵 나의 데생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다. 자연을 기초로 모델을 써서 작업했다”라는 말은 그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열정을 쏟아 부었는지 잘 보여준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으로 내려가 처절한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군상들을 목격한다는 주제인 만큼, 고통에 몸부림치는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한데 엉켜 녹아내리는 듯 표현한 ‘지옥의 문’은 우리에게 사후세계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듯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이 너무 관념적이거나 계도적인 면을 보여주길 원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에 대상 하나하나에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느끼는, 혹은 느꼈던 희로애락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수없이 구성을 변경하고 인물을 수정하며 수십 년 동안 그가 생각하는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애썼다. 죽을 때까지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지옥의 문’은 그의 이 작품에 대한 집착과 애정, 사고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06_생각에 빠진 채 영원히 박제된 인간의 모습 ‘생각하는 사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의 상단 중앙에 턱에 오른 팔을 고이고 앉아 있는 한 남자를 조각한 작품이다. 애초에는 ‘시인’이란 제목으로 단테를 표현한 작품이지만,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옷을 벗은 채로 바위에 앉아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1880년 완성된 이 작품은 1888년 독립된 작품으로 크게 제작하여 발표하고 1904년 살롱에 출품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긴장한 근육 속에 격렬한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켜 깊이 생각에 빠진 채로 영원히 박제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로댕의 전기를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그는 행위 하는 인간의 모든 힘을 기울여 사유하고 있다. 그의 온몸이 머리가 되었고,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가 뇌가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의 삶과 운명을 사력을 다해 고뇌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근육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이 작품은 살롱 출품 후 1922년까지 판테온에 전시되었다가 로댕미술관의 정원으로 옮겨졌고, 로댕의 묘지에는 모작품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지옥의 문’꼭대기에 자리 잡은 ‘세 망령’ (1880년)은 직사각형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돌출되어 있는 작품으로, 세 망령은 모두 고개를 떨군 채 각각 왼 팔을 내밀어 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있다.

이들은 지옥에 떨어진 자신들의 고통과 회한을 짊어지고 곧이어 벌어질 심판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운명을 탄식한다. 이 작품의 모델은 아담인데 고뇌하는 아담을 세 사람의 각각 다른 표정과 포즈로 표현했고, 한 사람씩 따로따로 제작해 한데 모아 한 작품으로 완성했다.

 

07_아름답고 순수한 영혼, 까미유 클로델과의 운명적 만남

1883년 인생의 최고 황금기를 보내고 있던 로댕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한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 까미유 클로델을 만나게 된다. 로댕의 나이 43세, 까미유의 나이 19세였다.

파리의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공부하던 클로델의 뛰어난 재능을 발견한 로댕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생동감 있는 표현력을 지닌 그녀를 제자로 삼아 자신의 작업실에서 함께 작업을 하였다.

수십 명이 일하는 그의 거대한 작업실에서 클로델은 두각을 나타내 제자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당시 작업 중이던 ‘지옥의 문’ 일부를 맡게 되었다.

함께 작업을 하며 가까워진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였다. 24살의 나이 차이는 두 사람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위대하고 완숙한 조각가 로댕은 클로델의 마음에 경외와 숭배, 끝없는 사랑의 불을 지폈고, 로댕 역시 그녀의 반짝이는 지성과 젊음이 갖는 생기에 매료되어 그녀에게 빠지게 되었다.

“그대는 내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질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슬픈 종말조차 내게는 후회스럽지 않아요.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의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 있다오”라고 로댕은 클로델에게 고백한다.

클로델의 로댕의 뮤즈가 되었고, 로댕은 그녀를 파리 사교계 모임에 데리고 다니며 유망한 조각가로 소개했다. 서로가 작품을 하며, 예술을 논하며 함께 하는 사랑의 이상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조각에 대한 뛰어난 재능과 로댕의 찬사에 힘입어 그녀의 작품은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클로델은 자신과 로댕의 사랑의 모습을 인도의 절대적인 사랑을 노래한 신화를 제목으로 삼아 ‘사쿤달라’를 제작해 1888년 상젤리제 살롱 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사랑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담은 것은 클로델만이 아니었다. 로댕 역시 클로델을 모델로 한 흉상을 12점이나 만들었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작품에 담으며 그들의 예술은 찬란하게 꽃피었다.

 

08_헌신적인 로즈 대신 클로델에 탐닉하는 자신의 모습?

남녀의 격정적인 사랑의 모습을 담은 ‘키스’는 단테의 소설 <인페르노>에 등장하는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이 소재이다. 이 비극은 두 가문의 자식을 정략 결혼시키려던 집안에서 절름발이에 추한 외모를 가진 장남인 신랑 대신 아름다운 외모의 동생을 내세워 결혼을 성사시킨 데서 시작된다.

처음 본 순간 서로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형 조반니에게 죽임을 당해, 두 연인은 구원받지 못한 채 서로의 사랑을 불태우며 지옥을 떠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형상화시켰다.

정념에 휩싸인 두 사람이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욕망 속에 서로를 갈구하며 키스를 하는 모습은 사랑과 집착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 같다. 헌신적인 로즈를 뒤로 한 채 클로델에게 탐닉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은 아닐까?

애초에 ‘지옥의 문’의 한 부분이었던 이 작품은 사이즈를 크게 키워 총 세 작품이 제작되었는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대리석으로, 두 번째는 청동으로 제작되었다.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곡선과 그녀를 지탱해 주듯 그녀를 향해 구부리고 입을 맞추는 남자는 넓은 어깨와 강인한 근육들, 여자에 비해 커다랗게 표현된 몸체로 인해, 연인을 감싸고 보듬어 주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 3톤짜리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대작에서 표현되는 인체의 사실적이고 유려한 곡선은 인체 표현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884년과 1889년 사이 5년에 걸쳐 제작된 ‘칼레의 시민’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중 1347년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칼레는 악조건 속에서도 1년간 영국군과 대항하다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는데,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을 고생시킨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측근의 조언으로 결정을 철회하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에 시민 6명을 뽑아오면 그들을 처형하겠다고 했다.

시민들이 모여 고민하는 사이, 칼레의 상류층 인사 6명이 자청을 해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는데, 이 진정한 노블리스 오브리제를 실천하는 영웅적인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로댕은 그들의 영웅적인 면을 묘사하기 보다는 죽음을 마주한 인간의 본능적인 두려움에 중점을 두어 표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려고 했다.

6명의 용감한 시민은 영국 왕비가 그들을 처형하면 뱃속의 아기에게 불길하다고 만류해 극적으로 풀려나게 되는데, 자신의 몸을 버려 모두의 목숨을 살린 고결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칼레시의 의뢰로 제작되었다.

 

09_생활고와 병에 시달리며 정신병원에서 생 마감

서로가 함께 한 시간, 지옥의 문, 키스, 칼레의 시민 등 로댕의 걸작들과 사쿤달라, 지강티와 같은 클로델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탄생했으니, 이 두 예술가의 만남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실로 위대하다 할 수 있겠다.

1893년 제작된 ‘영원한 우상’에서 양 손을 뒤로 하고 무릎을 접은 채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기대있는 남성은 로댕 자신이고 몸을 뒤로 살짝 젖힌 채 남자를 내려다 보고 있는 여인은 까미유 클로델이다. 이 작품은 클로델의 ‘사쿤달라’와 종종 비교된다.

‘사쿤달라’에서 여인은 팔을 늘어뜨린 채 지친 듯 남자를 향해 기대있고, 남자는 그녀를 일으키려는 듯 온 힘을 다해 부둥켜 안고 있다. 반면 ‘영원한 우상’에서는 여성은 하나의 우상처럼 보인다. 여인의 가슴에 경외와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남자는 자신의 뮤즈를 향한 숭배와 헌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클로델은 로댕을 누구와 공유한다는 사실을 못 견뎌 했고, 클로델이 결혼을 요구하자 로댕은 각서까지 써주며 로즈와 헤어지고 그녀만의 남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으나 로즈가 클로델을 찾아와 난리를 치자 로댕은 클로델을 홀로 내버려두고 로즈와 떠나고, 크로델은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아마도 50이 넘은 로댕은 독점욕이 강한,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연인보다는 사회적 평판이나 쌓아 올린 명성이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수십 년 동안 곁을 지켜온 사실혼 관계의 부인을 버리는 것은 당시의 도덕적 잣대로 볼 때 파렴치한 짓이라 여겼기 때문이리라.

로댕과 헤어진 클로델은 여성 조각가를 무시하는 화단의 풍토에서 홀로 서기를 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주위의 방해와 편견으로 생활고와 병에 시달리며 결국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반짝이는 햇살을 받고 싱그러움을 뽐내던 나뭇잎도 가을이 오면 바람에 흩날리어 땅에 떨어지듯 열렬했던 그들의 사랑도 그렇게 먹먹하게 떠나가 버렸다.

글을 맺으며, 이브 몽땅의 샹송 ‘고엽’을 들으며 사랑의 덧없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고엽

자크 프레베르

 

기억하라, 함께 지낸 행복스런 나날들을

그때 태양은 훨씬 더 뜨거웠고

인생은 훨씬 더 아름답기 그지 없었지.

 

마른 잎을 갈퀴로 긁어 모은다.

나는 그 나날들을 잊을 수 없어서

마른 잎을 갈퀴로 긁어 모으고 있다.

모든 추억도 또 모든 뉘우침도 함께…

 

북풍은 그 모든 것을 싣고 가느니

망각의 춥고 추운 밤 저편으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었지.

 

네가 불러 준 그 노랫소리

그건 우리 마음 그대로의 노래였고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너를 사랑했고

우리 둘은 언제나 함께 살았었다.

 

하지만 인생은 남 몰래 소리도 없이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는다.

그리고 헤어지는 연인들의

모래에 남긴 발자취를 물결이 지운다.

 

* 다음 호에서는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들인 아르누보의 대가 알폰스 무하와 만나겠습니다.

 

 

글 / 미셸 유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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