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여름이 갔다. 그날, 해님이 중천에 올라오자 나는 생각 없이 습관이 된 텃밭 건사하려고 챙 넓은 밀집모자를 챙겼다. 진작에 늙어 주름살투성이고 즐기는 테니스 때문에 새까매진 얼굴이지만 그래도 햇볕 막겠다고 밀집모자를 쓰고 나서는 내가 우스웠다.

우리 집 뒤쪽으로 마당이 있다. 호주처럼 뉴질랜드도 거의 대부분의 집에는 너르든 좁든 마당이 있다. 우리 집 마당은 잔디라기보다는 이름 모를 하얗고 노란 풀꽃들과 푸른 잡초가 어우러져 덮여있다.

주위 사람들은 마당 한쪽에 텃밭을 일궈 각종 채소를 유기농식품으로 재배해 한 철을 즐기기도 한다. 지인들은 스스로 가꾼 야채를 즐기는 기쁨과 경제적인 절약을 자랑하면서 나에게도 텃밭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텃밭 가꾸는 일이 서툴기도 하려니와 뭣보다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한편으론 풀꽃과 초록의 잡초를 그대로 아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사실 둥근 달이 떠오르면 이따금 마당으로 나가 달빛아래 청초한 풀꽃과 잡초 위에 앉아서 술 한 잔 홀짝이고 기어코 지나가버린 어린 시절과, 청춘과, 옛일들을 생각하면서 빙긋 웃기도 하고, 가슴을 치기도 하고, 한숨도 쉬고, 눈가에 살짝 눈물을 비치기도 하는 버릇도 버리기 아까운 청승이다.

그렇게 버텨온 올해 초, 마당 한쪽에 텃밭이 들어섰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큰손녀와 제 남자친구 ‘코쟁이’ 딜란 (Dylan)이 만들었다.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제 아버지를 따라 정원을 손질하면서 익힌 ‘텃밭 만들기’ 기술이 수준급이라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풀꽃과 잡초를 크게 상하지 않게 하면서 담벼락에 붙여 자그마한 텃밭을 만들어드릴 테니 자금만 대라고 했다. 큰손녀와 딜란은 뚝딱거리더니 가로 3m 세로 2m 정도의 직사각형 나무틀을 완성했다. 그리곤 나무틀 안에 흙을 사다 부어 평평하게 고른 다음 묘목을 심었다. 그렇게 해서 자그마하고 앙증맞은 텃밭이 탄생했다.

큰손녀가 텃밭에 상추, 고추, 피망, 방울토마토, 딸기, 깻잎 등의 모종을 옮겨 심었다면서 할아버지가 이것들을 건사하는 책임을 맡으라고 했다. 매일 정오 무렵에 물을 주라고도 했다. 나에게는 하루아침에 ‘일’과 ‘놀이’가 생겨난 것이다. 특별히 하는 일이나 놀이가 없어 먼 하늘 쳐다보고 서있기가 일쑤인 내게 일이 생긴 것이다.

후에 알았지만, 큰손녀가 걸핏하면 ‘하늘 보기’ 하는 할배 모습이 눈에 시려 생각해낸 텃밭 가꾸기였다. 텃밭 돌보기는 이상한 즐거움과 설렘을 가져다 줬다. 하루에 기껏 3-40분정도였지만 나는 밀집모자를 챙기고 햇살을 어림하느라 해님을 자주 올려다보고 테니스를 하다가도 시간을 체크했다. 텃밭에 물주고 이것저것 살피고 나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오늘 할 일을 다한 것 같은 기분 좋음이 있었다.

처음, 호스를 연결해 물을 주려고 보니 묘목들이 너무 어리고 작아 언제 자라서 먹을 수 있을지 한심스러웠다. 그런데 그 어린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조금씩 키가 커져갔다. 매일매일 물 주면서 키를 가늠해보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나는 텃밭 건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잘했다.

드디어 손톱만한 딸기가 열리고 구슬 같은 방울토마토가 선을 보였을 때 나는 하마터면 ‘와~’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상추도 잘 자라 먹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내가 좋아하는 싸한 향기의 깻잎도 아기 손바닥만큼 넓어졌다.

큰손녀가 묘목을 살 때 내가 특별히 당부한 매운 고추도 몇 개 열렸다. 마침내 숯불 삼겹살파티도 할 수 있었다. 올해 여름은 상추, 깻잎, 고추와 몇 알 안됐지만 딸기 방울토마토덕분에 새로운 즐거움을 알았다. 텃밭이 준 작은 행복이었다.

말했듯이, 그날, 습관이 된 텃밭 건사하려고 나섰다가 상추는 더 이상 잎을 달지 않고 줄기만 길게 서있음을 알았다. 피망도 방울토마토도 고추도 벌써부터 열매를 맺지 않는다. 따먹지 않은 깻잎만이 남아있다. 큰손녀가 얼마 전 이젠 텃밭 물 주기는 그만해도 된다고 했었다. 그랬다. 채소도 제 할일 다하면 조용히 제 살던 텃밭을 떠났다. 문득, 먼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참 푸르고 맑았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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