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진 들녘

최근에 핵과 관련해 북한과 미국의 샅바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북한이 단거리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북한의 저의를 분석하면서 잔뜩 긴장했다. 그 와중에 한국군 장성들이 골프를 쳤다고 한다.  언론은 그런 장성들의 ‘넋 나간 정신상태’를 비판했다.

헌데 냉정히 말하면 이런 ‘정신상태’를 만든 장본인이 언론이다. 그 시대 보수정권의 하수인인 언론들이, 지금도 몇 몇의 언론은 그렇지만, 뻑 하면 ‘북한 침략’ 운운하면서 긴장을 조성했던 탓에 군장성들 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늑대와 소년’에 익숙해져 있는 거다. 좌우간, 한국에서 골프는 말썽의 상징이다.

골프가 이렇게만 말썽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들의 부정부패 비리에는 으레 골프가 매개체로 등장한다. (최근에는 ‘별장’도 등장하지만) 내가 처음 지방지점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담당본부장이 제일먼저 했던 말이 ‘골프를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지역실세들과 어울릴 수 있다고 귀띔했다.

솔까말, 한국에서 골프는 대다수가 먹고 살기에 넉넉하고, 시간 넘쳐나고, 이런저런 이권으로 연결된 부류들의 전유놀이로 인식돼 있다. 그런 사람들의 놀이가 되다 보니 이래저래 말썽의 상징이 돼버린 거다.

한국사람들의 ‘골프 예찬’은 타의 상상을 불허한다. 뉴질랜드에 이민 오면 절대다수가 첫 번째로 하는 일이 골프 치는 일이다. 병적일 정도의 열정이다. 사실 그 열정이 충분히 이해되고 공감도 된다.

한국에서야 골프 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새벽같이 멀리멀리 가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린 피’가 속된말로 한두 푼이 아니다. 골프장회원권 구하기도 서민들로서는 천당 행 티켓 구하기보다 더 어렵지 않은가. 허나 뉴질랜드에서는 값싸게 어디서나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대중스포츠로 인식돼 있다. 이를 두고 누군가 빈정댔다. “귀족행세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에겐 뉴질랜드골프장은 자존심이 상할 거야.”

뉴질랜드에서 골프는 이야기하기 즉, 스토리텔링 (Storytelling)이다. 온갖 사는 얘기들을 나누며 함께 걷는 스포츠다. 다시 말하면 말썽이 아니라 평화와 평등의 상징이다. 일흔이 넘은 아내는 10여년이 넘도록 한 주에 두 번은 고정적으로 골프를 친다. 허벅지가 드러난 예쁜 골프치마를 입은 여든 넘은 여인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주중 골프장은 나이든 할매와 할배들의 천국이다.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오클랜드 동쪽에 있는 한적한 (어느 골프장이든 아주 약간 붐비는 주말을 제외하곤 모두 한적했다) 골프장에 갔었다. 앞쪽에서 한 골퍼가 덩치 큰 검둥개를 데리고 혼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 골퍼가 샷을 하면 검둥개는 쏜살같이 달려가 꼬리를 흔들면서 공 주위를 맴돌았다.

몇 번째인가 홀에 올라서자 옆쪽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앞쪽으로 펼쳐진 들녘으로는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검둥개는 노을이 지는 들녘에 떨어진 공을 향해 뛰었고 골프채를 어깨에 맨 골퍼는 느긋하고 편안한 걸음으로 검둥개를 쫓았다.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고 평화였다.

홀로 골프장에 나갔다. 어떤 이유로 골프를 중단하고 고국에서 즐겼던 테니스로 돌아선지 수년 만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골프장 옆을 지날 때마다 보이는 초록의 들판을 몸서리쳐지게 밟고 싶었고 검둥개가 뛰던 그 풍경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함께하는 스토리텔링 없이 혼자서만 걷고 싶었다. 큰손녀가 사다 준 나이키 표 물통에 물을 담고, 아내가 골프 치러갈 때마다 챙기는 아야야 (내 친구, 두 살배기 손녀는 바나나를 ‘아야야’라고 한단다) 하나를 슬쩍 하고, 먼지 낀 골프채를 챙겨 골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참, 마치 처음처럼 가슴이 설레는 것이 아닌가.

초록의 들판은 한갓졌다. 시간은 흘러 검둥개는 세월 속으로 떠나갔지만 초록의 들판은 변함없이 하늘 한 가을바람이 가득했다. 날아간 공을 더듬어가면서 나도 하늘거리며 천천히 한가롭게 들판을 걸었다. 샷을 하고 공을 쫓는 저 앞쪽 들녘에 스며든 눈부시게 향기로운 노을의 냄새에 울컥 눈물이 솟구치려 했다. 그것은 진정한 평온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남겨진 기어코 와버린 내 늙음에 새삼 감사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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