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2

제목“좋은 술이 한 병 생겨서 말이야…” #4582022-07-23 16:05

좋은 술이 한 병 생겨서 말이야…”

 

이번 추석에 사장님 댁에 인사 드리러 갈테니 다들 시간 비워둬요. 오후 여섯 시쯤 어떨까?”

 

나이 지긋한 기획실장의 이야기에 광고국장도, 영업부장도, 다른 부서장들도 모두 따라가는 눈치였습니다. “그럼, 추석 날 오후 여섯 시에 사장님 댁에서 모이는 걸로 합시다. 선물은 각자 알아서 준비하고, 오랜만에 술 한 잔 하면서 고스톱도 한 판 때리자구요.”

 

유 실장님, 죄송한데 저는 다른 약속 때문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라며 토를 다는(?) 저를 향해 넌 또 빠지냐?” 하는 못마땅한 눈빛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다니던 회사 중 한 곳이 좀 이상한(?) 풍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추석이든 설날이든 무슨 날만 되면, 심지어는 사장 생일까지도 간부들이 똘똘 뭉쳐사장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날 부서장들이 한 데 모여 회사 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팀웍도 돈독히 한다는 의미라지만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야근을 밥 먹듯 하고 휴일근무 또한 적지 않은 상황에서 명절까지 사장 집에 가서 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회사에 다니는 동안 저는 단 한 번도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나이도 어린 놈이 싸가지 없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그런 자리는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장님,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십시오. 고스톱 쳐서 간부들 돈도 많이 따시고이번에도 싸가지 없는 편집장은 뇌물로 대신합니다하면서 저는 사장이 좋아하는 씨바스 리갈 한 병을 건네주고 사장실을 나오곤 했습니다.

 

사장도 간부들의 그같은 방문을 좋아했는지, 아니면 굳이 오겠다는 걸 막을 수 없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1년에 몇 번 없는 명절을 그런 식으로 보내는 건 아니라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반면, 명절에 관한 가슴 따뜻한 기억도 있습니다. 80년 대 중반 추석 명절이 며칠 지난 어느 날 오후, 조그마한 출판사를 운영하는 김창환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김 기자, 오늘 바빠? 특별한 약속 없으면 저녁에 우리 집에서 술 한 잔 하자. 좋은 술이 한 병 생겨서 말이야!”

 

대학 캠퍼스 커플인 김창환 선배 부부는 아담한 술상을 준비해놓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 상 위에는 발렌타인 17년산 한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들이 추석 날 나 마시라고 돈 걷어서 산 거래. 그 친구들 자기들 살기도 힘들텐데 나까지 챙겨주니 얼마나 고마워?” 김 선배 부부의 눈에는 작은 정성을 모아준 예닐곱 명의 직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김 선배 부부도 명절이나 연말, 회사 창립기념일이 되면 꼭 직원들을 위한 조그마한 선물들을 정성스레 포장하곤 했습니다. 따뜻함이 담긴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는 그들의 모습에서 작은 행복이 읽혀졌습니다.

 

그날 우리는 제가 사들고 간 또 다른 좋은 술까지 기분 좋게 마시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20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이지만, 외국에서 맞는 여덟 번째 추석을 며칠 앞두고 가슴 따뜻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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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