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인생에서 한번쯤은!

정권이 바뀌면 이들에 대한 평가는 또 어떻게 바뀔지… 흥미로운 역사의 순환

소설 <샨타람 Shantaram>은 픽션이다. 신출내기 작가인 ‘그레고리 데이빗 로버츠 (Gregory David Roberts)’는 호주태생인데 그의 전력이 가관이다. 은행털이와 마약 거래로 수감생활을 하다 용케 감옥을 탈주하여 인도의 뭄바이 (Mumbai)이까지 간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갱단에 들어가 온갖 특이한 경험을 한다.

 

01_소설 <샨타람>은 처음 인도 방문하는 호주인들의 입문서?!

불가능이 없는 뭄바이의 지하경제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빈민가의 생활도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현지인들과의 피부색을 초월한 우정과 유대관계 그리고 본인의 사랑 이야기가 절절 녹아있다.

이런 자신의 실제 인도 생활에 상상력을 덧붙였고 책 제목은 자신의 인도 이름을 사용했다. 작가 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이 이 정도로 흥미진진한 픽션을 쓴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인도를 처음 방문하는 호주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입문서 같은 책이다. 다만 900 여 페이지의 두툼한 책이라 부담스럽지만 읽을 만하다. 작가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애매하게 끝을 맺어 다음 이야기가 계속되는 두 번째 책인 <The Mountain Shadow>를 자연스레 읽게 된다. 그런데 이내 실망한다. 작가 필력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속편이기 때문이다.

<샨타람>을 읽고 인도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인도에서는 내가 가진 상식이 비상식이 된다. 인도인들은 삶에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어차피 돈은 가네시 (ganesh)나 렉스미 (laxmi) 신이 허락해주는 대로 갖게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듯이 매일 가네시 신의 목에 메리골드 (marigold, 금잔화)를 새것으로 갈아 걸고 면으로 된 실과 기름으로 된 디야 (diya)라는 램프 불꽃을 켜놓고 내 자신을 온전히 신에게 맡긴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자연인 (natural man: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 들어가 사는 그런 자연인이 아니라 온갖 야망과 아집으로 뭉쳐진 세속적인 사람을 일컫는다)의 경지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힌두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들의 생활 자체가 믿음을 근간으로 하는 힌두적인 사고방식이다. 일이 흘러가는 대로 따른다. 억지로 방향을 틀려고 하지 않는다. 비틀스 (Beatles)는 요가와 명상으로 유명하고 갠지스 강에 걸쳐있는 리시케시 (Rishikesh)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인생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02_생애 한번쯤은 방문할 만한 곳, 나는 벌써 두 번째니 행운아!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주옥 같은 곡들을 만들어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인도에서는 과거의 생활에 상관없이 누구나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기도, 명상 그리고 금식이 생활의 일부분이다.

도로에 표시된 3차선이 5차선이 되어도 누구 하나 삿대질하지 않는다. 곡예사처럼 끼어들기를 서로가 한다. 인도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이런 상황을 재미있게 ‘organised chaos’라고 한다. 다만 경적을 과도하게 사용해 자동차 매연과 더불어 최대의 공해다.

인도에서 가장 작은 주 고아 (Goa)의 2018년 10월 말 날씨는 2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동안 나만 변했을 뿐 아열대 산천은 의구했다. 생애 한번쯤은 방문할 만한 곳이 인도라고 하는데 나는 벌써 두 번째나 왔으니 행운아인 셈이다.

얼마 전 끝난 장마철 뒤에 찾아온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인도 음식에 들어가는 온갖 향신료, 인간이 버린 쓰레기뿐 아니라 도로 위를 어슬렁거리는 버려진 소, 염소, 개, 돼지 그리고 기타 야생동물들이 쏟아내는 배설물과 하수구에 정체된 물이 합동으로 만들어내는 특이한 냄새가 그래도 익숙함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허락되어 오후 비행기로 고아에서 델리 (Delhi)까지 갔다. 1911년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던 시절 수도를 옮기면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뉴델리 (New Delhi)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저녁 10시까지 문을 여는 ‘딜리 하트 (Dilli Haat)’에 들렀다. 플리마켓 같은 장터인데 온갖 인도 전통 옷과 귀금속 그리고 수공예품들이 즐비하여 눈요기하기에 좋았다.

모디 (Modi) 수상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한 일명 모디 조끼 (Modi jacket)을 입어 보았다. 이 조끼의 원래 이름은 ‘카디 (Khadi)’이다. 인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원단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이 조끼를 만들어 입었는데 식민지배를 하던 영국은 이 전통 직물기술을 사장시켜 인도인들이 영국에서 들어오는 옷을 입게 만들어 인도의 경제를 황폐화 시킨바 있다.

 

03_간디, 인도인들의 경제적 자립 위해 카디 조끼 입기 장려

이에 간디는 인도인들이 영국에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카디 조끼 입기를 장려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20년대에 국산품을 애용하여 일제의 경제 수탈정책에 대항한 ‘물산장려운동’에 비견할 만한 비폭력 불매운동이었다.

수공예품 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일종의 매직 박스였는데 이 박스 안에 들어있는 또 다른 작은 박스를 찾아내는 것이 이 박스를 만든 장인의 의도다. 볼수록 장인의 솜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로는 푸리 (puri)와 바지 (bhaji)를 먹었는데 입맛에 맞았다. 푸리는 밀가루 (wheat flour)로 만들어 기름에 넣어 튀기는데 풍선처럼 부풀고 안이 비게 된다.

이것을 적당한 크기로 찢어 토마토, 감자, 코리앤더 (coriander), 쿠민 (cumin 또는 지라, jeera) 그리고 콩이 들어간 바지와 함께 먹는다. 지라와 코리앤더를 넣어 밥을 지으면 지라밥 (jeera rice)이 된다. 이 지라밥에 달 (dal)을 섞어 먹으면 환상적이다. 물론 바지를 밥과 같이 먹어도 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인도 최대 미나렛 (minaret)인 ‘쿼텁미날 (Qutub Minar)’을 찾았다. 이슬람의 예배당인 모스크에 가면 보통 미나렛이라는 뾰쪽한 첨탑이 있는데 이 쿼텁미날은 높이가 73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총 5개 층으로 이루어진 이 첨탑은 이슬람의 무굴 제국 (Mughal empire)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전 힌두 왕조가 몇 왕들을 거치면서 층을 점점 더 쌓아 올려 마침내 5층이 된 것이다.

각 층에는 발코니가 만들어져 있고 아래층들은 주로 붉은 사암 (red sandstone)을 사용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대리석 (marble)도 같이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왕들은 매일 아침 꼭대기에 올라가 동쪽에 위치한 ‘야무나 (Yamuna) 강’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04_화장된 간디 유해 안장돼 있는 ‘라지 가트’는 현충사 축소판

까마득히 높은 첨탑을 바라보면서 신의 힘을 빌어 왕국을 잘 다스리려고 애쓴 왕들의 신실한 마음을 엿본다. 첨탑 안의 계단을 통해 일반인들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1981년 어린 학생들이 내려오면서 압사하는 참사를 겪은 이후에는 관광객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곧이어 찾아간 ‘로터스 사원 (Rotus Temple)’은 인도의 국화인 연꽃 모양이다. 세계 모든 인종을 하나의 믿음으로 규합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바하이 (Bahai)교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건축물은 하얀 대리석으로 된 27개의 연꽃 잎이 위로 올라 가면서 3개로 모아지는데 그러면서 9개의 선이 만들어진다.

더불어 사원으로 들어오는 문이 9개며 사원 주변의 연못과 정원도 9개이다. 태양광을 이용하여 사원이 사용하는 전체 전기양의 일부를 자체 충당한다고 한다. 100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예배를 볼 수 있고 내부 구조상 소리가 진동의 물결을 타고 울림이 깊다.

종파를 초월한 영적인 설교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바하이교의 가르침대로 사원 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심지어 설교하는 교단도 없다. 관광객들을 위한 10분간의 설교를 들으면서 잠시 속세와 단절되는 낯섦을 즐겨본다.

화장된 간디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라지 가트 (Raj Ghat)’는 현충사의 축소판이다. 가트는 강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일컫는 용어인데 역시 이 지역 가까이에 야무나 강이 있다. 그 지역의 이름을 빌어 간디를 기억하는 신성한 공원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추모공원답게 입구부터 잘 꾸며져 있다. 검은색 대리석이 화장이 된 자리를 알려주고 있고 꺼지지 않는 불꽃도 있다. 간디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해방이 된 이듬해인 1948년에 암살 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화장이 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격동의 시기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인 불안정이 야기한 여러 정치인 암살 사건이 오버랩 된다.

강물을 끌어와 지하 우물에 저장한 생활 방식은 초기 인더스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뉴델리에 그 유적지가 있다. ‘아그라센 키 바올리 (Agrasen ki Baoli)’ 우물로 이어지는 경사지가 계단으로 되어 있어 소위 계단식 우물 (step well)이다.

 

05_7만 여 인도 군인들 넋 기리는 위령탑 인디아 게이트

지금은 우물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독특한 문화 유적지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총 108개 계단은 3단계로 되어 있는데 각 단계의 양쪽 벽에는 아치형의 구멍이 뚫려져 있다.

현재의 형태가 갖추어진 14세기에는 그곳에 다양한 힌두교 신들의 상이 놓여져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계단이 끝나는 아래까지 내려가니 한낮인데도 한기가 느껴지고 바닥이 드러난 우물 안은 갈매기들의 배설물만 쌓여 냄새가 고역스럽다. 갈매기들의 서식지가 되어버린 이곳의 계단을 오르내릴 때 갑자기 날아드는 배설물을 조심해야 했다.

아그라 (Agra)로 가는 고속도로에 접어들기 전 ‘인디아 게이트 (India Gate)’로 들어선다. 이곳이 바로 영국 식민시절 여러 전쟁에 영국-인도 육군 (British Indian Army)의 깃발 아래 참전하여 희생된 7만 여 인도 군인들의 넋을 기리는 높이 42미터의 위령탑이 있는 곳이다.

탑은 1921년에 세워졌고 인도 독립 25주년을 기념하여 추가된 ‘불멸의 불꽃’은 1972년에 점화가 되었다. 물론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보장해준다는 감언이설로 수많은 인도 젊은이들을 자신들의 제국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터에 데리고 나갔다.

게이트의 벽면에는 전사한 병사들 중 1만 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이름들을 보면서 나는 일제 강점기 시대 일본이 벌인 전쟁터에 강제로 징용되어 끌려가 희생된 한국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300킬로미터 정도 가면 인구 1만 여명 정도의 소도시 카우라 (Cowra)가 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시드니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인 이곳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연합군과 일전을 벌이다 체포된 일본과 이태리 군인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나라를 잃어 일본군에 섞여 싸우던 한국 군인들도 당연히 이곳 수용소에 있었다.

 

06_뉴델리에서 아그라까지는 시멘트로 된 ‘야무나 고속도로’ 이용

기록을 보면 호주 당국에서는 한국군과 일본군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분리 수용을 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쯤인 1944년 8월에 1000여명의 일본 군인들이 탈주를 감행한다.

이 사건을 ‘카우라 탈옥 (Cowra breakout)’이라 부른다. 진압 과정에서 230 여명의 일본군이 희생되는데 그 중 몇 명의 한국 군인들이 이 탈옥에 가담했고 몇 명이 희생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이미 70년 대 초 일본 정부는 카우라 시 당국과 함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일본 정원과 문화원을 세우기로 합의한다.

남반구에서 가장 큰 규모인 일본 정원은 이제 카우라의 명소가 되었다. 에도 시대 정원의 형태를 띈 이 정원을 걸어보면 일본 정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지 알게 된다.

일본 정원에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광활한 면적에 이제는 주춧돌과 잡초만 무성한 수용소를 마주 할 수 있다. 와가 (Wagga)를 다녀오는 길이면 나는 매번 이곳에 들러 그 당시 이곳에서 포로생활을 했던 한국 군인들을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기대고 하소연할 나라가 없었다. ‘이게 나라냐?’라고 울분을 쏟아낼 만한 조국이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던 고국은 손발이 다 잘린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누군가의 귀엽고 소중한 아들이었을 그들은 이국의 외진 감옥에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일본 군인들의 멸시와 천대를 어떻게 견뎠을까?

일본군들이 집단으로 탈옥한다는 것을 낌새 채고 몇 명이나 가담 했을까? 공식적인 일본 군인들의 사상자 숫자에 혹시 한국인은 없었을까? 형태 없는 수용소의 한 귀퉁이에 서서 상념에 잠기면 이런 먼 곳까지 와준 동포에게 감사의 악수를 해오는 한국 군인들의 긴 행렬이 보이는 것 같다.

뉴델리에서 아그라까지는 시멘트로 된 ‘야무나 고속도로 (Yamuna Expressway)’를 이용하면 된다. 복잡한 뉴델리의 도로를 벗어나 위성도시인 노이다 (Noida)에 도착해서야 잘 닦여진 고속도로에 진입하게 된다.

 

07_샤자한은 감금된 별장에서 자신이 만든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생을…

네 시간 이상을 달려 ‘타지마할 (Taj Mahal)’에서 불과 6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숙소에 드디어 도착하자 나는 숨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짙은 어둠 속에서 겨우 윤곽만을 드러낸 돔 모양의 지붕… 달빛에 반사되는 타지마할의 매혹적인 모습을 볼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다음 날 새벽 여섯 시, 타지마할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긴 줄이 예사롭지 않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타지마할은 떠오르는 태양에 멋지게 보인다고 해서 아침부터 이 난리다.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인 ‘샤자한 (Shah Jahan)’이 사랑하는 왕비의 무덤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인데 황제 자신도 나중에 자신의 딸에 의해 이곳에 묻힌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 건축물은 페르시아와 무굴 건축양식이 혼합 되었다고 한다. 역시 무덤 (실제 무덤은 지하에 있고 가묘가 올라와 있는 셈이다)이 있는 중앙이 건축물의 핵심인데 돔 지붕은 안에서 보면 그리 크지 않지만 그 위로 더 큰 돔 지붕이 덧씌워져 있어 밖에서 보이는 돔 지붕은 압도적이다. 마침 한국말을 몇 마디 하는 현지인을 만나 건축물과 내 모습이 동시에 연못에 투영되는 명당자리를 잡아주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타지마할의 백미는 대리석에 입혀진 문양이다. 대리석에 섬세한 문양을 파 그 안에 여러 색상을 지닌 보석 돌을 넣었는데 이 정교한 작업에 2만 여 명의 기술자들이 동원되었고 다양한 보석은 외국에서 수입을 했다고 한다.

보석돌을 다듬어 대리석에 파인 구멍에 붙여 넣었는데 사용된 풀의 레시피는 일급 비밀이었을 것이다. 벽에 새겨진 문양들만 감상하는 것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오늘날까지 이 장인들의 후손들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 기술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다.

샤자한의 말년은 불운했다. 왕자의 난으로 형까지 죽이고 권력을 잡은 아들 ‘오랑젭 (Aurangzeb)’에 의해 ‘아그라 성 (Agra Fort)’에 있는 한 별장에 감금된다. 타지마할과 아그라 성은 야무나 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샤자한은 감금된 별장에서 자신이 만든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08_아그라 성은 무굴제국이 델리로 수도 옮기기까지 요새형 궁전

아그라 성은 샤자한의 할아버지 ‘악바르 (Akbar)’가 아그라를 무굴 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아그라 성을 대대적으로 재건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성벽의 안쪽에는 벽돌을 쓰고 외부는 붉은 사암으로 마무리했다. 그래서 성 전체가 매끄러운 붉은색이다.

할아버지와는 취향이 다른 샤자한은 붉은 사암 대신 하얀 대리석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그라 성 내부에 있는 많은 건축물들은 거의 대리석이다. 물론 말년에 자신이 만든 이 대리석 건축물 중 한 곳에 감금되는 수모를 당하지만. 아그라 성은 무굴 제국이 수도를 델리로 옮기기까지 황제들이 거주했던 요새형 궁전인 셈이다.

17세기에는 뭄바이를 중심으로 힌두교의 ‘마라타 (Maratha) 왕국’이 세워지는데 그 중심에는 위대한 전사 ‘차트라파티 시바지 (Chatrapati Shivaji)’가 있었다. 그는 이성계처럼 장군으로 활약을 하다가 새 왕국을 세워 초대 왕이 된다. 무굴 제국의 황제인 오랑젭에게 강력히 저항했다. 제대로 된 시스템으로 정치를 했고 백성들의 지지로 세력 확장을 했다. 무굴 제국과는 화친과 전쟁의 관계를 반복하면서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오랑젭의 입장에서는 시바지가 눈의 가시었다. 급기야 오랑젭이 대군을 보내자 전략적으로 시바지는 무굴 제국과 화친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오랑젭은 시바지를 아그라 성으로 불러들인다.

아홉 살짜리 아들과 함께 아그라 성으로 들어온 시바지는 자신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놀라 격분을 한다. 그러자 오랑젭은 시바지를 성에 감금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시바지가 무굴 제국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제안, 회유하지만 시바지는 거절을 한다.

얼마 후 시바지는 신에게 바치는 단 음식의 공물 (실제 힌두교 의식을 보면 신에게 단 과자를 바친다 – 그래서일까? 인도인들의 설탕 소비는 도가 지나친다. 홍차, 우유, 향신료가 들어간 인도의 전통 음료인 차이에 설탕을 많이 넣어 하루에 5-6잔은 보통 마신다. 그리고 뱃살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만과 당뇨 발병 빈도가 예사롭지 않다)이 담긴 바구니를 운반하는 일꾼으로 변장을 하여 성을 빠져 나가 위기를 모면한다.

 

09_2000년 전 인도 공주가 한반도 지방 토후국 왕과 결혼, 가락국을

마침 인도에 힌두교 우월주의를 강화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힌두 근본주의 성향을 띈 모디 총리의 탄탄한 정치적 위상과 국민으로부터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을 얻어 이 운동이 광풍으로 될 조짐이 보인다.

모리 총리는 한국과 관련된 허왕후 이야기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허황후 전설에 따르면, 인도 공주가 2000년 전에 한국으로 가서 당시 한반도 지방 토후국의 왕과 결혼하고 가락국을 건국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어로 된 문헌에 따르면 당시 아요디아 (Ayodhya) 왕국의 왕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그에게 명하기를 당시 16세 된 그의 딸을 지금의 경주 지역에 있는 가락국왕인 김수로와의 결혼을 위해 한국으로 보내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리 총리는 그 혈맹의 인연을 강조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허왕후를 여러 번 언급 했을 뿐 아니라 김정숙 여사를 2018년 11월 초에 따로 초청하여 ‘허왕후 기념공원 (Queen Huh Memorial Park)’ 착공식에 참여하게 하였다.

인도의 힌두 여인이 한국의 기원 초기에 한반도로 건너가 왕비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은 힌두 문명의 위대함을 대외에 과시하기에 손색이 없는 소재다. 신화와 역사를 혼동한다는 비난이 모리의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더군다나 허왕후 출신 지역이 우타르 프라데시 (Uttar Pradesh) 주의 아요디아 지역이다. 라마 (Rama) 신의 탄생지이기도 한 신성한 곳이다.

이런 곳에 허왕후 기념비와 공원이 조성되는 것이다. 눈 여겨 볼 대목은 이 지역이 바로 모디 총리가 속한 인도 국민당의 거점이라는 것이다. 라마 신이 지향하는 힌두교 군주의 이상 정치와 국민당의 정당 강령이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아요디아에서는 과거에 라마 사원의 건립을 둘러싸고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분쟁이 일어났으며, 모리가 과거 구자라트 (Gujarat) 주 총리로 재직 당시에도 그 주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힌두 교도들에 의해 집단 학살을 당한 일도 있었다. 모리는 이 사건의 해결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아 그의 편파적인 자세가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또한 모리 총리는 영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한 걸출한 인도 건국의 선구자 3명 (간디, 네루 그리고 파텔) 중 인도 초대 총리를 지낸 네루 밑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을 지낸 구자라트 주 출신인 파텔 (Partel)을 띄우고 있다.

 

10_한국 외환위기 극복 금 모으기 닮은 ‘파텔 동상 건립 철 모으기 운동’

세계 최대 높이의 동상 제막식을 통해서다. 동상은 받침대를 포함해 높이가 240미터라고 한다. 내가 인도에 도착한 다음 날인 10월 31일에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파텔 동상 세우기 운동’은 모디가 구자라트 주지사로 있을 때인 2010년부터 추진이 되었다고 하는데 총선 승리로 자신이2014년 인도 총리가 되자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극복 금 모으기 운동처럼 동상의 세우는데 필요한 철 모으기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장롱 속에 있던 금까지 모일 정도로 한국 국민의 호응을 얻은 것처럼 인도에서는 농부들이 농기구까지 자발적으로 바쳐 동상 건립에 보탰다고 한다. 파텔은 신생 독립국인 인도 초창기 시절에 정치를 하면서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인도 연방 정체성 확립에 앞장 섰다고 하니 모리가 지향하는 방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종교간 화합을 내세웠던 간디나 네루 말고 파텔을 더 추켜 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런 ‘파텔 재조명’이 순수한 의도와는 다르게 간디와 네루 깎아 내리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모디 총리는 집권 이후 고대사재검토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서부에 있는 라자스탄 (Rajasthan) 주에서는 2016년 공립학교 교과서에서 네루와 간디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슬람 무굴 제국에 저항한 힌두 왕조의 영웅 시바지가 모리 총리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흥미 있는 것은 2021년에는 파텔 동상보다 더 높은 또 다른 대형 동상이 뭄바이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 동상의 주인공은 바로 시바지 왕으로 힌두 민족주의의 대표주자인 시바지가 이제 인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셈이다. 나에게는 전혀 놀랄만한 뉴스가 아니다. 다만 다시 정권이 바뀌면 이들에 대한 평가가 또 어떻게 바뀌게 될지… 역사의 순환은 참으로 흥미롭다.

 

글 / 박석천 (글벗세움 회원·찰스스터트대 교수)

Previous article쿨한 조연
Next article시드니 시티 퀸 빅토리아 빌딩 산책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