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피정

어머니, 말의 길을 잃은 소녀는 어떻게 걸어가나요 전에 살던 집 화단에 심었던 들깨씨 받아다가 작은 터 일구어 뿌렸어요푸르게 올라온 이파리는 잊혀진 사랑처럼 허기지게 먹었습니다 어머니, 깻잎을...

저승보다 먼 길

나는 흰 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유령 왼쪽 팔이 오른쪽 팔을 알아보지 못하는안개 낀 펜리스의 새벽 짙은 어둠에서 빠져 나온 시가더 아름답다고 당신은 말했지 M4 고속도로엔가로등마저 삼켜버린 안개 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퇴근 전철은 떠나는 이가 남긴 뒷모습처럼 쓸쓸하고 하루 무사히 넘긴 날은 달빛 조각 같아요   마이너스 20도였던 오늘보다 내일은 더 춥다고 가슴 패인 원피스 살랑살랑 웃으며 TV날씨를 전합니다...

겨울과 봄 사이에 활활

뒷마당 한켠 가마솥에겨울을 활활 태운다 매화꽃이 길을 밝히는Wentworth Falls view road 단단한 바다를 건너온강진 출생 무쇠솥 수증기 같은 사연모락모락 내뱉으며 드디어사골탕을 완성했다 혼자 걸어가는 여동생벽 아래 자주 주저앉던 남동생 뜨끈한...

진정한 스토커

아직 침대에서 꼼지락 댈 때어렵고 복잡한 주문을 걸어혼을 빼가던 그 어둑한 발소리로 다가와전등을 떨게 하던 그 길 건너 술집에서 지켜보던그림자 밥풀이 냉장고 안에서 날아다니고연어 참치가 도마 위에...

진술서

저는 시를 쓰지 않습니다진술만 할 것입니다제가 쓴 글들은 시가 아닙니다 감정의 상태만 기술하겠습니다제 글을 가슴에 담는 건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시는 당신이 쓰십니다저는 당신의 시를 밤새 읽으며당신의 시로...

닮은꼴

우리 집엔두 마리 고양이가 있었다. 딸이 결혼하기 전이집 저집 데리고 다니다가퍼스로 이사 가며남기고 간 고양이들 카이사와 히메 몇 해를 함께 지내다 보니고양이들의 성격이조금씩 아이들을 닮아갔다. 카이사는 느긋하고 깔끔하며,무엇보다...

카톡 카톡

둥글고 단단한 새벽 우리 동네 슈퍼마다동치미 무들이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가을무는 아무렇게나 담가도맛있어야""한 다발 사 올 뻔했어." 논두렁의 누런 호박탱글탱글한 통팥 가마솥 한가득 쑤어내던 죽 동치미 양은 사발그 둥근...

더웨이

빰 할퀴고 지나간 바람 잡지 마세요붉은 대문 한 번 더 녹슬잖아요 천 개의 바람이 불어천 개의 전쟁이 일어요 슈츠케이스 들고 찾아온 그이는정확한 시간에 들른 거죠 구불구불 창자...

밤의 레시피

가을을 토막 낸다가을 무를 썬다 쓰윽 쓰윽 썩 썩 썩부서진 가을이여인의 손끝에서 하얗다 도마 위에 서 있던도미노 행렬이국솥으로 무너진다 시퍼런 혀 날름거리며훑어대는 가스레인지에엉덩이 달아오른 국솥 안에서무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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