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Karma

꿈꾸기조차 노동이던 밤 나는 펜을 들었다 쓰려던 것은 네 이름이었으나 기억은 이미 다른 생으로 건너가 있었다   언제부터 비어 있었는지 시간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조바심만 손목 안쪽에서 맥처럼 뛰었다   기억조차 닿지 않는다면 그...

코스모스

처음 빛이 너무 커서 그림자부터 피어났다   뿌리는 계절을 읽지 못했고 햇살은 낯선 말처럼 따가웠다   이민 가방 한쪽에 숨겨온 그리움 한 줌 북풍 아닌 남풍 맞을 줄 그때는 몰랐다 모국어의...

침묵 피정

어머니, 말의 길을 잃은 소녀는 어떻게 걸어가나요   전에 살던 집 화단에 심었던 들깨 씨 받아다가 작은 터 일구어 뿌렸어요 푸르게 올라온 이파리는 잊혀진 사랑처럼 허기지게 먹었습니다   어머니, 깻잎을...

저승보다 먼 길

나는 흰 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유령   왼쪽 팔이 오른쪽 팔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개 낀 펜리스의 새벽   짙은 어둠에서 빠져 나온 시가 더 아름답다고 당신은 말했지   M4 고속도로엔 가로등마저 삼켜버린 안개   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퇴근 전철은 떠나는 이가 남긴 뒷모습처럼 쓸쓸하고 하루 무사히 넘긴 날은 달빛 조각 같아요   마이너스 20도였던 오늘보다 내일은 더 춥다고 가슴 패인 원피스 살랑살랑 웃으며 TV날씨를 전합니다...

겨울과 봄 사이에 활활

뒷마당 한켠 가마솥에 겨울을 활활 태운다   매화꽃이 길을 밝히는 Wentworth Falls view road   단단한 바다를 건너온 강진 출생 무쇠솥   수증기 같은 사연 모락모락 내뱉으며   드디어 사골탕을 완성했다   혼자 걸어가는 여동생 벽 아래 자주 주저앉던 남동생   뜨끈한...

진정한 스토커

아직 침대에서 꼼지락 댈 때 어렵고 복잡한 주문을 걸어 혼을 빼가던 그   어둑한 발소리로 다가와 전등을 떨게 하던 그   길 건너 술집에서 지켜보던 그림자   밥풀이 냉장고 안에서 날아다니고 연어 참치가 도마 위에...

진술서

저는 시를 쓰지 않습니다 진술만 할 것입니다 제가 쓴 글들은 시가 아닙니다   감정의 상태만 기술하겠습니다 제 글을 가슴에 담는 건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시는 당신이 쓰십니다 저는 당신의 시를 밤새 읽으며 당신의 시로...

닮은꼴

우리 집엔 두 마리 고양이가 있었다.   딸이 결혼하기 전 이집 저집 데리고 다니다가 퍼스로 이사 가며 남기고 간 고양이들   카이사와 히메   몇 해를 함께 지내다 보니 고양이들의 성격이 조금씩 아이들을 닮아갔다.   카이사는 느긋하고 깔끔하며, 무엇보다...

카톡 카톡

둥글고 단단한 새벽   우리 동네 슈퍼마다 동치미 무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가을무는 아무렇게나 담가도 맛있어야" "한 다발 사 올 뻔했어."   논두렁의 누런 호박 탱글탱글한 통팥   가마솥 한가득 쑤어내던 죽   동치미 양은 사발 그 둥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