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불짜리 지폐

한국에 있는 동안 동대문 평화시장과 남대문시장엘 각각 한번씩 다녀왔습니다. 평화시장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호주에서보다는 한국에서 사오는 걸 더 선호하는 아내의 수영복 몇 벌을 구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가성비 높은 쇼핑 후에는 근처의 광장시장에 들러 여러 가지 주전부리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더했습니다.

남대문시장에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에이든과 에밀리 두 녀석 옷을 사기 위해서 갔습니다. 워낙 방대한 아동복 코너를 갖고 있는 곳이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포키아동복’ 빌딩을 찾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숍들을 쭉 돌아보며 스캔(?)을 끝낸 후 아내는 본격적으로 예쁜 옷 결정하기 삼매경에 들어갔습니다.

여자아이들 옷 고르기가 훨씬 어렵다더니 공주드레스를 좋아하는 봄이를 위해 아주 여러 차례의 까다로운 선발전(?)을 거쳐 녀석에게 딱 어울릴만한 드레스를 들어올렸습니다. 이어 아주 깜찍하고 예쁜 ‘소녀소녀한’ 외투와 치마도 한 벌 챙겼습니다. 둘 다 겨울 옷이라서 당장은 입히지 못할 상황이지만 아내는 예쁜 옷을 입고 입이 함박만해질 에밀리의 모습에 벌써 기분이 한껏 좋아진 듯했습니다.

이어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 잘생긴 훈이를 위해서는 멋진 밀리터리 룩 한 벌을 챙겼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 녀석 옷을 고르느라 서있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피로감도 좀 느껴졌지만 녀석들의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그 같은 기분은 일순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정작 ‘내 자식들’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사질 않았습니다. 정말 희한하게도 아내와 저는 ‘남의 새끼들’ 것 챙길 때가 더없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얼마 전, 아내와 둘이 톱라이드쇼핑센터에 갔다가 녀석들에게 입히면 좋을 것 같은 옷들을 발견하고는 페이스톡을 걸었습니다. 한국에서 사온 옷들이 몇 달은 지나야 입을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지금 입을 수 있는 옷들에 자연스럽게 눈이 간 겁니다. 아직 2학년, 킨디인 두 녀석이지만 취향이 확실해서 영상으로 옷을 보여주고 마음에 들어 하는 것들로 최종 결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와 옷 고르기 통화가 끝난 에이든이 할아버지랑 할 얘기가 있다며 바꿔달라고 했답니다. 스마트폰 속의 녀석은 “할아버지, 피 많이 뽑았으니까 제가 고기 사드릴 게요”라고 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며칠 전, 몇 가지 검사를 위해 혈액검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피도 여러 병 뽑고 채혈과정이 수월치 않아 고생을 좀 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딸아이가 집에 가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훈이는 계속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할머니 생일파티를 위해 우리 일곱 식구가 딸아이 집에 모였습니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벨 소리를 듣고 현관까지 쏜 살 같이 달려 나온 녀석이 제 품에 안기며 가장 먼저 한 이야기입니다. 마음 착한 녀석은  ‘피 많이 뽑은 할아버지’ 걱정이 계속 됐던 모양입니다.

제 손을 잡고 집안으로 이끌고 들어간 녀석은 저에게 50불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 피 많이 뽑았으니까 이걸로 고기 사먹으세요.”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여덟 살 반짜리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 사려 깊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동안 모아뒀던 세뱃돈 중 알뜰하게 쓰고 남겨뒀던 70불 중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거금 50불을 ‘피 많이 뽑아 안쓰러운 할아버지’를 위해 망설임 없이 쾌척한 겁니다. 이 돈을 어찌 해야 할까요? 녀석의 말대로 고기 사먹고 피를 보충하는 것도 좋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50불짜리를 그렇게 써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녀석이 준 돈을 다리미로 빳빳하게 잘 다려 라미네이팅을 한 후 예쁜 액자에 넣어 영구보존 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기 때부터 할아버지라면 껌뻑 넘어갔던 녀석의 할아버지 사랑이 다른 아이들처럼 4학년쯤에서 멈추지 말고 아주 오래오래 계속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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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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