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척

대한민국을 끌고 가는지, 밀고 가는지 혼란스러운 인간들이 모여있는 한 정당에서 새로운 시대 개혁의 문을 열겠다면서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다.

뭐가 비상이어서 비상대책위원회인지 모르지만, 비상상황을 헤쳐나갈 비상대책위원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그들의 표현대로 ‘새 시대 새 희망’을 설계할 위원들은 40-50대가 중심이었다.

놀라웠다. 흔히 말하는 사려 깊은 원로는 없었다. 나이든 사람들은 새 시대를 위해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속뜻을 비대위원구성에서 보여줬다.

그들의 말처럼 비상대책위원이라면 무엇보다 세월의 온갖 풍상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텨온 연륜과 경험을 축적한 인물이어야 바람직할 거다. 머리와 가슴으로 직접 겪어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습득한 의술로 비상환자에게 과연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릴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길고 험한 영욕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나이든 사람들의 혜안과 경험과 지식과 노하우가 이제는 낡고 헤져 새 시대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건가?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를 역류하겠다는 건가?

극우보수라는 한 50대 위원이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상황을 거론하면서 “우리사회의 세대간 갈등을 대화로 풀어내긴 어렵다. 지금 가장 최대의 비극은 노인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이다. 노인들은 빨리빨리 돌아가셔야 한다”고 노인들을 폄하했다.

60세 정도 되면 죽었는데 100세 가까이 살아있으니 늘어난 40여년을 누가 보살필 거냐며 가족은 물론이고 국가도 너무 오래 사는 노인들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점증되는 제반 문제에 얽매여 개혁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뜻있는 사람들이 역사는 물론 인간생명의 존엄성도 모르는 천박하고 무식하고 몰지각한 인간이라고 거세게 항의했다. 결국 물러났다.

몰지각한 인간이 물러나긴 했지만, 누구나 입을 다물고는 있지만, 노인들의 생산성 마이너스 때문인지 ‘물리학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욕심 때문인지, 아무데나 끼어드는 사리분별 못하는 막말 때문인지, 실제로 노인폄하시대다.

건강수명 73세라고 한다. 그런데 평균수명은 83세라는 거다. 즉, 죽기까지는 10년동안 병석에 누워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노인은 오래 살면 살수록 천덕꾸러기가 되는 거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 시대 새 희망을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인들은 자신을 인테리어 하는 아는 체, 있는 체, 잘난 체하는 3체병에 걸려 말이 너무 많다고 고개를 젓는다.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노인은 그저 귀찮은 존재로만 인식되는 흐름이다. 무시당하는 노인들은 쓸쓸하다. 노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가 삶의 고달픈 명제가 됐다.

하지만 혜안을 지닌 현명한 노인은 서글프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대접은 아니더라도 귀찮다는 취급은 당하지 않고 살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라는 옛 선조들의 말씀도 있지 않던가.

노인인 그의 식구들은 외출할 때면 으레 ‘다녀오겠습니다’고 인사를 한다. 식구들의 다녀오겠다는 인사 한마디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나마 그건 노인인 자신에 대한 관심이니까.

그런데 식구들 누구도 외출할 때 그에게 어디서, 누굴, 무엇때문에 만나고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도 묻지 않는다. 섭섭해하지도 않는다. 다녀오겠다고 하면 그냥 잘 다녀오라고 화답한다.

나이 듦을 과시하고 참견하는 것처럼 외출하는 사람을 불러 세워 어디에 누구 만나러 가느냐고 꼬치꼬치 묻는다는 건 상대를 피곤하고 짜증나게 한다. 그건 주책없는 짓이다.

그는 주위의 누구에게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이 아니라면 입을 닫는다. 벌써 전부터다. 어딜 가느냐, 누굴 만나느냐, 왜, 언제, 무엇때문에, 어떻게 같은 말은 그의 입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다.

비단 그런 말뿐이 아니다. 노인의 생물학적 인문학적 존재의 의미, 정의같은 말도 하지 않는다. 해봐야 시대에 뒤쳐진 헛소리, 잔소리 취급을 받아 튕겨져 나오는 그들의 항변, 변명, 훈계를 되레 들어야 한다.

그가 배우고 익힌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품성’에 대한 교훈도 유통기한 다한 상한 우유 같다며 짜증을 불러 관계의 껄끄러움만 일으킨다. 사회현상만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실재하는 현상이다.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며 변화다.

무시당하지 않은 노인의 최선의 삶은 나대지 않고 참견하지 않고 물같이 바람같이 사는 거다. 그러노라면 노인 푸대접과 폄하하는 말들도 잦아들지 모른다.

노인인 그는 세상의 편안함과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3척’에 파묻혀 묵언수행 하면서 살아간다. 그는 침묵을 사랑한다. 그는 고요함을 사랑한다. 그는 평온함을 사랑한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Previous article노매드랜드 (디지털유목민) 영화를 보다
Next article마에스트로 번스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