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내 머리만큼 커다란 호박이다. 한여름의 진초록과 바람이 풀어낸 연녹색 단호박이 식탁 위에 덜렁 놓여있다. 방금 낑낑대며 들고 와 둘 곳을 찾다가 올려둔 거다. 아쉽다. 어떻게 해야 맛있게, 특별히 오늘을 기억하는 맛으로 먹을 수 있을까. 지금 크기의 절반이면 정말 보물처럼 아껴먹을 텐데…. 저렇게 자라도록 내버려둔 친구의 바쁜 일상이 안타깝다. 호박은 애호박을 최고로 친다. 단호박도 직경 15센트이상 자라면 상품성이 떨어진다. 한 달 반 전에 먹은 조선호박은 호박볶음과 그날 저녁 된장국으로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 맛을 입이 기억하는 듯 입안에 침이 고인다.

 

퇴근 후 친구와 늦은 점심을 했다. 버스를 타고 가겠다는 친구를 억지로 차에 태웠다. 경전철 공사로 기차가 없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친구를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친구의 집 앞에 도착하려는데 잠깐 길 위로 차를 올려 달라고 했다. 그녀의 집은 대로변에 있어 차를 세우려면 신경 쓰인다. 조심스레 보도블록 위로 차를 올려 안전하게 내리고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세웠다.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열어 둔 채 쏜살같이 집 안으로 달려간다. ‘잠깐만!’이란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커다란 호박 두 덩이를 가슴에 안고 나타났다. 마치 준비해 둔 것처럼 순식간에 호박을 앞 좌석에 놓고 문을 닫는다. “빨리 가.” 차 문을 닫는 그녀의 볼이 발그레하다. 한 손으로 도저히 들 수 없는 호박을 좌석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서야 겨우 뒷좌석으로 옮길 수 있었다. 집까지 데려다 준 내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차 뒷좌석에 가득 담겼다.

 

저렇게 큰 호박을 어떻게 하지? 두 손으로 겨우 들 만큼 큰 호박은 애호박과 달리 먹는 방법이 많지 않다는 생각으로 고맙기도 하고 부담되기도 했다. 차에서 호박을 꺼내자, 가죽 시트에 호박 진이 끈적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차가 움직이자, 호박도 따라서 움직인 것이다. 호박은 끈끈한 친구의 마음을 그려 내게 보여주는 듯하다. 물 휴지를 꺼내 쓱쓱 닦았다. 시트는 곧 제 모습을 찾는다. 호박이 그려준 지도를 내 맘속에 간직했다. 뒷좌석을 볼 때면 호박이 떠오르겠지. 커다란 호박 두 덩이를 안고 집으로 들어섰다.

 

남편은 식탁 매트를 거의 차지한 커다란 호박을 쳐다보며 웃었다. “볶아도 되겠다. 아직 파랗잖아…” 그 동안 나 대신 부엌을 책임져온 살림꾼다운 말에 희망을 걸었다. 두 손으로 감싸 안아 흐르는 물에 씻었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꼭지를 살짝 비껴 칼을 꽂았다. 늙은 호박이란 예상을 뒤엎고 칼은 쉽게 들어갔다. 아직 호박껍질이 채 여물기 전이다. 커다랗다고 미리 겁먹었던 마음이 미안했다. 호박 살은 애호박의 흰색을 벗은 엷은 상아색이다. 아직 씨가 여물지 않아 꼭지 부분부터 자잘한 하얀 씨들이 별처럼 늘어서 있다. 붉은 햇빛에서 흰색과 초록색을 뽑아내 자신을 감싼 채 속살을 채우는 중이었다. 황금색이 되려면 아직 가을바람이 필요하기에 여전히 호박은 여름을 안고 있었다. 칼이 지나간 표면에서는 초여름 향기가 기지개를 켠다.

 

마늘 향이 은은하게 밴 말캉한 호박 복음이 떠올랐다. 시계를 봤다. 아직 7시. 그녀에게 호박볶음을 전해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런 맘일까. 지란지교를 꿈꾼 여류 시인이 원하던 친구가 되어보고 싶다. 나와 나누고 싶은 그대는 남자여도 좋다는*, 늙어가는 우리를 이해하는 성별조차 초월한 친구. 지란의 향기를 꿈꾸는 그녀가 원하던 것은 조건 없이 받아주는 너를 앞에 두고 싶다는 뜻이리라. 마음이 급해진다.  ‘초조하지 않는 웃음’을 머금도록 이 밤이 깊어지기 전에 전해 주고 싶다. 우정이 녹아있는 호박볶음은 하루에 두 번 만나는 행운을 주는 셈이다. 초록과 연녹색이 줄줄이 흐르는 호박 껍질을 모두 벗겼다. 호박을 두껍게 썰어 소금을 살짝 뿌렸다.

 

호박 볶음에는 마늘기름이 있어야 한다. 햇마늘이라던데 마늘껍질이 단단하다. 호박도 마늘도 각각의 특성에 맞게 껍질 속에서 온전히 자리하고 있다. 우리들도 각자의 껍질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키워가고 있을까, 나는 또 내 자리에 충실한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껍질들이 나의 하루를 점검해준다.

 

뜨거운 팬에 기름을 떨어뜨리고 곱게 빻은 마늘을 넣었다. 마늘향이 넓게 퍼지는 순간 휘리릭 저은 후 물기를 꼭 짠 호박을 넣었다. 잊었던 호박볶음 냄새가 코에 와 닿는다. 친구의 수고가 덩달아 식탁에 놓인다. 땅은 무심히 작물을 출산하지 않는 법. 새벽 어둠이 이슬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여름 내내 암꽃과 수꽃을 찾아 수정시키는 손길, 줄기를 따라 커가는 호박을 찾으며 다 큰 호박이 바닥에 닿을까 걱정되어 미리 줄기를 잡아 올리는 노력을 해 왔을 친구. 집으로 가는 동안 친구는 또 얼마나 이 호박을 주기 위해 신경을 썼을까. 차 문을 닫지 않고 뛰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내가 이렇게 좋아할 것을 알았을까.

 

저녁상을 차리며 호박볶음 한 접시를 담는다. 홀연히 찾아 올 ‘수의 입을 날’이 오기 전에 내 마음이 식을까 봐 차 시동을 건다. 아직 그릇이 따뜻하다.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발췌

 

 

장미혜 (캥거루문학회 회원·2005년 수필문학으로 등단·수필집: 오십에 점을 찍다·현재 시드니에서 회계사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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