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봄은 찰나다. 그 순간의 덧없음에 미혹되는데 나는 여지없이 그 수렁에 빠진 한 미물이 되고 말았다. 슬라이드 쇼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꽃들의 찬란함 앞에서 두 눈은 오히려 공허했다. 계절과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가 선택했거나 기획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주가 짜준 시간대에 들어가 오감을 활용할 뿐이다.
봄기운이 천지에 가득함을 느낀다. 여전히 나이의 완숙함을 느끼지 못한 나는 봄기운을 아직 시각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봄기운은 어떻게 생겼을까. 다른 계절에 비해 수줍고 정돈된 표정을 지니고 있을 것 같다. 동시에 생기발랄하면서 과장이 없는 표정일 수도 있다. 깊은 내면의 비밀을 간직한 새침데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에 대한 해답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가능할 것 같다. 그때쯤이면 여명과 함께 무릎걸음 하면서 툇마루로 기어 나오겠지. 땅속에서 잠자던 미물들이 깨어나 굳은 땅에 균열을 일으키는 미미한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하지 않을까. 그 나이 되어 신체의 늙음과 자연이 교감하고 트임이 가능해야 마당의 후미진 구석까지 가득 찬 봄기운이 비로서 보일 것 같다. 그 봄기운을 빌어 옆에 있는 동반자와 함께 나는 어떤 소통을 하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자신의 존재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가 스스로 자지러지는 꽃에는 그리움이 없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모국의 봄에 대한 애잔함이 있다. 온 산의 엽록소가 일제히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아우성칠 때 여느 마나님과 영감님이 마주하는 봄기운과는 결이 다른 기척을 나는 듣는다. 수십 번 반복된 봄 즈음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진 참사나 재앙이 만들어낸 귀울림이다.
시대의 흐름에서 벌어진 사태로부터 파생된 고통은 대부분 소수만이 짊어져왔다. 나아가 그 처참함이 빚어내는 모든 조건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생활환경이었다. 다수인 우리는 오랫동안 그 고통을 능동적으로 분담하여 시대의 난제를 극복해본 경험이 없다. 고통은 늘 소수에게 전가되었다. 반면 다수는 운 좋게도 기회와 정보를 십분 활용하여 우월적 위치에서 고통으로부터 늘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글을 쓰지만 시적인 소양이 아직 부족하여 시인 김종삼 (1921-1984)의 대표작 ‘민간인’을 들이민다. 그는 고유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능력이 없는 소수자인 갓난아이에게 관심을 보인다. 1947년 봄 / 심야 / 황해도 해주의 바다 /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 기침도 금지되어 있었다 / 십여 명이 타고 있었다 /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그의 다른 작품인 ‘어두움 속에서 온 소리’에서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원한이 뼈무더기로 쌓인 고혼의 이름들과 신의 이름을 빌려 호곡하는 것은 동천강변의 갈대뿐인가…. 그렇다. 동천강변 뿐이 아니다. 제주도를 비롯하여 한반도 곳곳에서 봄 무렵에 소수의 뒤엉킨 삶이 출렁거렸다.
다수는 망자들이 단지 불운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소수의 고통이 문화적 또는 사회적으로 표출 되는 것이 다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다수가 먹고 사는 일에 해가 된다는 논리를 들먹인다.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극복해야만 좋은 세상이 된다는 다수의 말은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가엾은 중생들의 숟가락을 걷어차는 굴욕적인 언사다.
소수의 고통에 대한 김종삼의 관심은 나라의 경계를 넘나든다. 나치독일 정권이 저지른 학살을 근거로 그는 1960년대에 아우슈비츠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통해 다수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나는 시에 실린 많은 개념어들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단어들은 낯설어서 근본을 알 수 없고 허망하기도 하다.
같은 역사적 주제를 가지고 한 영화감독은 소수가 감당해야 할 고통의 몫을 우리 모두 골고루 나누어서 짊어져야 한다고 외친다. 그 메시지 또한 아름답다. 2023년에 개봉된 영화 ‘The Zone of Interest’가 그렇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의 가스실 건립과 운영 책임자인 독일군 장교 루돌프 (Rudolf)는 수용소 담장 바로 옆에서 아내, 자식들과 함께 여유로운 생활을 한다.
반면, 담장 너머 유대인들은 뒤집힌 대게처럼 꼼짝 못한 상황에서 발버둥친다. 영화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서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게 한다. 나는 영상과 관객 사이에서 빚어지는 내밀한 작용들을 담장 너머의 연기, 총소리, 비명소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멀지 않은 시간대에 한반도에서 살았던 소수들에게 벌어진 여러 참사들은 여전히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통해 계속 탄생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시심이 가득한 세상의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며 영원한 광명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 요인으로 지금도 부당한 고통을 받는 소수의 사람들은 어쩌면 스스로 몸을 세우지 못하고 다른 나무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덩굴식물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봄의 끝자락에 자주 빛 꽃으로 은은한 향기를 뽐내며 만개하는 덩굴식물인 등나무를 속리산에서 만났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 서로 다른 개체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구나. 소수의 길과 다수의 길이 결국은 닿아 있었다. 자락길과 둘레길은 기어이 연결되고 있었다.
군말 – 2024년 6월 24일 화성시 배터리공장 화재로 인해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들 대다수가 모국에서 구겨진 삶을 다소나마 펴보려 한국에 온 외국인이었다. 또다시 소수들에게 일어난 참사다. 6월 28일 저녁 화성아트홀에서는 KBS교향악단의 연주가 있었는데 공연 마지막 추가곡으로 그들을 기리는 추모곡인 ‘에드워드 엘가 (Edward Elgar)’의 ‘님로드 (Nimrod)’가 연주되었다. 연주 후 교향악 단원 및 관중은 박수 대신 함께 묵념했다. 나는 봄이지만 봄 같지 않은 봄 속에서 살고 있다.
* 2024년 3월 10일 제 9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장편국제영화상 (Best International Feature)과 음향상 (Best Sound)을 수상했다. 영화에서는 수용소 담장 너머로 총성과 비명소리만 들리며 유대인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글 / 박석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