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투섬 (Cockatoo Island)에 다녀왔습니다. 시드니 시내 부두에서 배로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함께 한 글동무들은 저까지 모두 아홉 사람이었습니다. 다들 예순 안팎의 나이든 ‘문청’들이었지요.
그대가 이 섬에 가 본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곳은 시드니 초창기 때 영국에서 온 죄수들을 가둬 놓은 곳입니다. 많은 죄수들이 이곳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며 형극의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불행한 역사의 공간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유폐현장이 문화가 될 수 있는지 잘 모르지만 시드니를 찾은 관광객들이라면 대부분 한번은 들른다고 하네요. 짐작하시다시피 저 같은 사람이 딱 좋아할 곳입니다. 아이 엠 어 히스토리메이커.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글을 한 편 쓰려고요.
부두에 내려 역사현장으로 올라갔습니다. 감방과 일터, 독방과 식당 등을 보았습니다. 한 공간은 그 당시에 상황을 볼 수 있는 자료 전시회가 상시 열리고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꽃다운 청춘들이 섬에 갇혀 있었던 그 당시를 상상하니 만감이 오갔습니다. 죄수의 피눈물로 세워진 나라, 호주. 오늘의 찬란한 빛은 그들의 어둠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 현장을 둘러봤습니다. 바닷가에는 텐트들이 참 많더군요. 함께 간 글동무에게 물었습니다. 이 용도가 무엇이냐고요. 글동무 왈. “이 텐트는 여행객을 위한 숙소예요. 하루이틀 여유 있게 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곳이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시드니 시내 야경도 한 눈에 즐길 수 있어요. 텐트에는 두 사람까지 들어갈 수 있어요.”
이 글동무가 한 말 중 어느 대목에서 가장 기분이 좋았을까요? 그래요. 바로 ‘두 사람까지’입니다. 그대와 나, 이렇게 둘이서 텐트에 들어가 손을 잡고 하늘의 별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꼭 둘이 아니더라도, 그대는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별’에 나오는 아가씨가 되어 내 어깨를 등 삼아 졸고요. 목동 소년은 아가씨의 볼을 만질 듯 말 듯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해도 좋을 겁니다.
근데요. 저도 알아요. 이건 참 힘든 낭만일 거라는 것을요. 잠깐 텐트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우리 아가씨를 거친 바닥에 주무시게 할 수는 없지요. 그냥 제 상상사랑입니다.
그런데 더 흥분되는 게 있어요. 섬 가장 높은 곳에 우아한 숙소가 하나 있어요. 일종의 별장이라고나 할까요. 그대와 같은 ‘우아씨’가 주무시는 곳이죠. 아가씨가 있는 곳에는 머슴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 집을 통째로 빌려 그대는 망사 커튼이 처져 있는 침대에서 주무시고 저는 그 옆 하꼬방 같은 곳에서 꾸벅꾸벅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선잠을 잘게요. 그래도 제게는 영광이죠.
이곳에 가본 적 없으시죠? 무조건 가본 적이 없어야 합니다. 꼭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그대가 어느 날 이곳 시드니에 오신다면 제가 그곳으로 꼭 모실게요.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네요. 숙박료도 일류호텔 못지 않고요. 그래도 내 님이 황홀하게 주무실 그 기쁨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뛰네요.
페리를 기다리는 사이, 섬에 있는 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했습니다. 남자 셋, 여자 여섯. 잠깐 스캔을 해도, 깊게 관찰해도 그대만큼 멋진 여인은 없었습니다. 제 마음이 하나도 안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일흔은 넘어 보이던 (나중에 들어보니 올해 71세라고 하더라고요) 한 글동무가 노래를 뽑더라고요. 자기 흥에 겨워 갑자기 그런 것이지요. 노래 제목은 장윤정의 ‘초혼.’ 그 여인이 유투브에서 노래를 찾아 따라 불렀습니다.
살아서는 갖지 못하는 / 그런 이름 하나 때문에 / 그리운 맘 눈물 속에 / 난 띄워 보낼 뿐이죠
첫 소절이 들리는 순간 제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일전에 유투브에서 장윤정과 어느 할아버지가 함께 부른 ‘초혼’ 장면이 떠올라서요. “살아서는 갖지 못하는….” 그래서 맥주 한 잔을 벌컥 마시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따라가면 만날 수 있나 / 멀고 먼 세상 끝까지 / 그대라면 어디라도 / 난 그저 행복할 테니.” 다행히 마지막 가사는 이렇게 끝납니다. 저는 그걸로도 충분히 행복하려고요. 하나만 약속해줘요. 코카투섬에서 하루만 우리 둘만의 감옥에 갇혀 있겠다는 것을요.
*윤대녕의 여행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의 형식을 빌려 쓴 글입니다.
박성기 (문학동인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