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젖어 드는 마음이었다. 파통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오랜만에 젖어 드는 마음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내 위주의 경험과 공상으로 기대감을 채워나갔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펍은 지금쯤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겠지. 해물 스파게티와 흑맥주는 여전히 근사할 거야. 해안선을 따라 즐비한 해송은 얼마나 더 늠름해졌을까. 지난여름 물난리 후 모래사장을 빼곡히 뒤덮고 있던 유칼립투스 삭정이들은 치워졌겠지 등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지극히 환하고, 넓고, 긴, 사실화 같은 장면들이었다.
나는 ‘젖는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촉촉하고, 익숙하고, 빠져들고, 스며들고, 고이는 느낌이 있어서이다. 이것은 내 생각 속에 사는 어떤 실체와 만나서는, 지루한 일상을 일렁임으로 바꾸어 놓는 불씨가 되곤 한다. 순간에 불꽃이 일어 서서히 퍼지는 현상이라 그 실체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세월이 녹아든 한 사람의 역사 위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데, ‘조짐’이라는 직관에 기대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음악, 장소, 영화 등에서 이런 느낌에 휩싸일 때가 많다. 어떤 때에는 사소한 발걸음이나 음식 냄새 따위가 될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어떤 감성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물결처럼 증폭시키는 불가역적인 위대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달 캥거루 합동 모임을 ‘파통가’에서 하자고 했을 때, 거친 듯 통통거리는 느낌의 원주민 단어가 덜컥 가슴에 걸렸다. 그리운 이에게로 가는 마음, 닿을 수 없는 이를 향한 손짓,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과 같은 종류의 설렘이었다. 촉촉한 감정에 젖어 본지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가슴이 말라 나는 이런 호흡이 너무 반가웠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스스로 고립감에 쌓여 지내왔다. 물론 겉보기와는 다른 고백이다. 순전히 ‘내가 생각하는 나’이기에 사실 여부를 따지기엔 불편한 지점들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나는 이런 나의 고립감에 대해 좀 더 근원적으로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거슬러 보면 코로나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나는 일찌감치 사람과의 관계에서 팬데믹에 가까운 고립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혼자서도 잘 지내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이런저런 (교회, 봉사단체 등등) 사교 모임에서 가두리 밖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가 선택한 옵션이라면 옵션이기도 했다,
나는 기러기 가족으로 오랫동안 남편과 떨어져 살고 있다. 종종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는 위로조의 농담을 듣곤 하는데 당치 않은 위로라고 여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떨어져 살려고 한 부부가 얼마나 있겠는가. 지극히 평범한 내가 조금 특별한 처지에 놓여있는 것만이 사실일 뿐이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서야 부부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민 사회에서 혼자라는 처지가 주는 불편함을 깨달았다. 나는 자연스레 이 질서에서 도태되었고, 고립을 자처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책과 온라인 세상으로 스며들었다. ‘내가 가꾸어 온 나’를 지키고 싶었고, ‘불필요한 나’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사회성과 투지와 맷집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에 터진 팬데믹은 내게 정서적으로 묘한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아이러니였다. 나는 오히려 다 같이 고립된 이 사건에서 안도감, 동질감, 쾌감 같은 그런 종류의 해방감을 맛보았다. 이런 내가 너무 낯설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동안 나는 내 고립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써왔다. 바쁜 척하기, 씩씩한 척하기, 안 아픈 척하기, 내가 선택한 길이 필연이고, 나는 이 길을 아름답게 걷고 있다고 자기최면 걸기 등등의 커튼을 드리우고서는 말이다.
마음의 여력이 없을 때,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을 때, 숨어버리는 방법은 다소 비겁해 보이지만, 꽤 안전한 처세였다. 이런 점은 내가 이민자라는 특정 상황을 이미 배경에 두고 있다고 하면 이해받기가 조금 쉬워질 것 같다. 이민은 결혼만큼이나 큰 전환점이었으니까.
이러저러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편을 따라온 이민의 행보였다. 이민 초기에는 한두 줄로 꿸 수 없는 감정의 소모가 많았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는 혼자 차를 몰고 어디론가 무작정 길을 나서곤 했다. 대체로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아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다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오래된 펍이나 한국 강세나 산세를 닮은 장소를 발견하는 날이면 더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나는 감히 단언한다. 그때 그렇게 쏘다니며 만났던 장소들이 이방의 도시 시드니에서 나의 존재를 긍정하며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세인트 알반스, 코카투 아일랜드, 민 피들러, 카툼바, 머지, 소팔라, 하틀리, 파통가 등의 지명을 단숨에 나열한다. 셀 수 없을 만큼 찾았고, 불러본 곳들이다. 아이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자존심이 상할 때,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마음에서 불이 일어날 때마다 호명하는 대로 위로가 되어 준 곳들이다. 소래포구, 월미도, 춘천, 석모도, 연안부두, 자유공원, 제부도나 다를 바 없는 이름들이다. 그 중 파통가는 남다른 일렁임으로 내 안에 머물러, 소리를 낼 때마다 마음이 펴지는, 장소 이상의 세계로 존재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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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새 이 존재들로부터 꽤 멀리 와있다. 멀리 왔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파통가 해변의 무심한 오후 햇살과 해송 탁자 위로 불던 소금기 없는 바람을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기억에 기대 퍼 올릴 수 있는 것들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젖어 드는 마음과 나를 환기해야 할 무엇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기댄 방법들이 옳았다는 것을 증언하려 한다. 자리가 옮겨질 때마다 퍼렇게 멍이 들던 내 정체성의 뿌리, 그 치유의 실마리 중심에 우리 모두의, 누구나의, ‘파통가’가 있었다고.
유금란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5인 공저: 바다 건너 당신·문학과 시드니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