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부모를 더 이상 모실 수 없게 된 자식이 깊은 산속에 부모를 내다 버리는 풍습을 고려장이라고 한다.
헌데, 결코 아름다운 풍습은 아니다. 옛날 그 시절, 아버지가 장정이 된 아들에게 눈만 껌벅거리는 할아버지를 지게로 져다 산속에 지어놓은 움막에 버리라고 시켰다. 아들은 산속 움막에 할아버지를 버리고 빈 지게로 내려왔다. 이를 본 아버지가 그 지게도 버리지 않고 뭘 하러 가져왔느냐고 핀잔을 줬다. 아들이 ‘나중에 아버지 늙으면 그때 쓸 거’라고 대답했다.
눈 가물가물해지고 귀 어두워지고 멍해진 늙은 어머니를 버리려고 아들이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산속을 가는데 지게 위에 앉아있는 어머니가 자꾸 나뭇가지를 꺾었다. 아들이 왜 자꾸 나뭇가지를 꺾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너 돌아갈 때 길 잃지 말라고 표시해두는 거다’라고 대답했다.
언젠가부터는 늙은 부모가 스스로를 건사하지 못하면 산속 대신 요양원으로 ‘보내 버린다’고 한다. 요즘 요양원은 시설이 잘 돼 있어서 홀로 있어야 하는 집보다는 ‘확실히 좋다’는 것이 늙은 부모를 요양원으로 보내버리는 돈 많고 잘사는 자식들의 공통된 주장이란다.
얼굴 찡그리며 듣기 싫어하겠지만, 그건 자신의 행동을 감싸기 위한 변명이면서 동시에 자기 위로다. 늙은 부모는 못 먹고 못 입는 것보다 가족으로부터 홀로 내팽개쳐지는 외로움에 더 무서운 공포를 느낀다고 하면 나는 피곤한 사람인가?
세상이 각박해지고, 삶의 욕망이 거대해진 사회의 흐름을 좇아야 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 그래서 은혜 공경 희생이라는 말이 거북스럽다. 이런 세상에서 늙은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버리는 아들 딸들을 꾸짖는다는 건 어쩌면 주제 넘는 짓거리인지도 모르겠다.
효나 윤리를 거론하며,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휘둘리지 않을 정신의 좌표를 일러준 ‘퇴계 이황 선생’의 웅숭깊은 가르침을 입에 담기조차도 부담스럽다. 어둠 가득한 산속이 아니라 불빛 밝은 요양원이라도 보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대한민국 울산에서 치매증세를 보이던 팔순 노모가 자식 셋에게 차례로 버림을 받아서 택시에 버려졌다고 한다. “저녁 무렵 40대 남자가 택시를 세운 뒤 팔순 할머니를 차에 태운다. 사위라는 이 남자는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운전기사에게 주며 할머니를 그곳으로 모셔달라는 말만 전하고 급히 사라졌다. 올해 85세 된 할머니는 택시 안에서 한숨만 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적지인 둘째아들 아파트에 도착해 운전기사는 경비실 인터폰으로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둘째 아들 부부는 할머니를 이곳에 보냈다는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아예 집을 비워버렸다. 한참을 기다린 뒤 운전기사는 할머니를 차에 태워 파출소를 찾아갔으나 경찰 소관이 아니라며 냉담했다.
늦은 밤 운전기사는 할머니를 회사 기숙사에 데려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운전기사는 할머니의 아들 집에 전화를 했다가 심한 원망만 들었다. 할머니를 절대 못 모시겠으니 버리든지 아니면 당신 맘대로 하라는 소릴 들었다.
2년 전부터 치매증세를 보여온 할머니는 큰아들과 딸 그리고 둘째아들로부터 잇달아 버림받은 뒤 주위의 비난이 빗발치자 마지못해 둘째아들이 어머니를 맡기로 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식의 허물을 애써 감추면서도 설움에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택시 고려장’이다. 이런 일이 과연 어느 특정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 분노보다 먼저 슬픔이 솟구친다. 사회가 점차 개인화 되어가고, 사람의 가치를 돈과 권력으로 평가하게 되면서 ‘인간의 기본 도리’를 저버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기본을 지키면 오히려 손해 본다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인간됨을 포기한다면 과연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사람답게 사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할아범은 당연히 할멈보다는 먼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헌데 요즘은 할멈 보낸 후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범이 먼저 떠난 후 할멈이 ‘택시 고려장’ 당할까 봐 걱정이 돼서다. 그래 봐야 도긴 개긴 이지만.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