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지비치 (Coogee Beach)에서

이곳이 작은 천국이 아닐까. 아침에 눈을 뜨니 드넓은 수평선 사이로 아침 해가 고요히 차오르고 있다. 침대 머리맡에 누워 눈 속 한 가득 들어오는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멍 때리고 있는 중이다. 코발트색 바닷물을 등뒤로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소리가 적당히 가까이에서 시원하게 들려온다. 발코니 앞에 커다란 야자수 나무들이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성장했을 야자수 나뭇잎들.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마른 가지 잎들처럼 사각사각, 파도소리와 어우러져 환상의 협주곡을 선사하고 있다.

햇볕이 구름에 가려져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그리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의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적절한 날씨를 내어준다. 이름 모를 바다 새들이 나도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건지 저 멀리서 지저귀고.

아기 새가 있음에 틀림없다. 저렇게 귀여운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풀장과 비치 뷰가 있는 우리 방은 발코니 통 유리 문만 열면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한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풀장에서 놀고 있다. 저렇게 조용히 노는 것도 어려운데 참 신기하다. 그 뒤를 이어 젊은 친구들이 왔다 가고 다시 풀장에는 평화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결혼 후 수많은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숙박시설에서 지내보았지만 뷰만은 이번 호텔이 최고였다. 바닷가 바로 앞에서 자고 일어나 드넓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어젯밤 빗속을 뚫고 도로 터널에서 헤매다 유턴을 해서 겨우 도착한 악몽도 보상받는 듯했다.

사실 평소 같으면 하루 종일 학교에서 학생들과 복닥거리다 집에 와 휴식해야 할 주중이었다. 퇴근 후 시드니까지 세시간 넘는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시드니로 오는 길에 카툼바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한식에 대한 자부심을 전통 놋그릇에 고급지게 담아낸 담백한 비빔밥과 닭불고기는 퇴근 후 밀려오는 피곤함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시드니 바닷가 동네에 나 있는 비좁은 길을 따라 촘촘히 붙어있는 주택가를 지나니 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호텔이 보였다. 늦은 밤 비까지 쏟아 내려 정신이 없었고 주변이 어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성급이라는 호텔 방은 이제껏 다녀본 다른 호텔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하지만 아마 청소했던 사람이 카펫 청소 하는 것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깜빡 했나보다. 고급 호텔이라 해서 기대를 하고 왔다가 그 순간 실망이 컸었지만 하는 수 없이 청소를 다시 하게 했고 연거푸 죄송하다는 직원을 다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망망대해가 눈 앞에 펼쳐진 호텔 레스토랑에서 조식뷔페를 했다. 반달 모양으로 된 안락한 라운지 의자에서 평소에 즐겨 마시는 차이티 (Chai Tea)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인생 중반에 찾아온 마음의 여유로움이 주는 기쁨은 과연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할 정도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게 될 정도였다. 친절한 직원들의 봉사를 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고.

지난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시간들의 결실을 조금이나마 위로 받고 있는 순간이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젊은 부부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완벽한 화장에 액세서리까지 잘 차려 입은 부인은 지난날 나의 열정적이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젊은 날 철없이 남에게 비쳐지는 나의 모습을 더 의식하고, 작은 것들에 연연하며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하게 살았던 지나버린 시간들 속. 성숙하지 못했던 나.

어디를 가든지 나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젊을 수가 없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벌써 인생 중 후반에 서 있는 신체가 주는 현실을 최근 맞닥뜨렸다. 의사가 내린 고혈압이란 진단을 받아들이지 못해 어떻게 하면 약을 먹지 않을 수 있을까 몇 달 동안 안간힘을 썼다. 운동과 식생활로 조절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운동 강박 속에서 생활했다.

그래서인지 퇴근 후 시간이 더 바빴다. 하루라도 땀을 흘리며 뛰지 않고 루틴 운동들을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이제는 과감히 내려놓아야 할 때인가 보다. 아무리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려 해도 이제는 아침마다 혈압 약을 자연스럽게 챙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대신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더 나다워질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할 시간이다. 내게 주어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본연의 자유로움을 천천히 찾아봐야 할 때다.

바닷물이 따뜻해지며 수평선 너머 쌍무지개가 확연히 피어나고 있다. 가끔 집에서 보았던 무지개와는 또 다른 경이로움을 선사하고 있다. 철없는 아이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일곱 색깔 영롱한 색의 향연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햇볕이 살짝 수그러드는 오후엔 무지개가 화려하게 지나갔던 바다에 수영을 나가 봐야겠다. 파도엔 이제 어느 정도 단련된 내 몸을 이끌고.

 

 

글 / 송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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