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로 친구를 붕우 (朋友)라고 쓴다. ‘붕’과 ‘우’가 모두 친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두 글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오십에 읽는 주역>에서 강기진 작가는 ‘우’는 오른손 두 개가 모여진 글자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고 ‘붕’은 그 당시 화폐였던 조개묶음이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것으로 가치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는 손을 잡고 걸어갈 만큼 정이 두터운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나 놀이친구를 말하는 것이고 ‘붕’은 단지 친하게 지내는 벗이 아닌 자기와 같은 동류 즉 정신적으로 같은 지향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오십이 넘은 시점에서 사귀는 친구는 젊을 때와 다르게 나와 뜻을 같이하는 벗, 달리 말하면 정신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하며 다른 한편으로 위로를 받았다. 얼마 전부터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일에 조금의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친구를 사귀는 것이 젊을 때보다 어렵게 느껴지고 때로는 귀찮았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쏟는 일에 열정이 시들해진 것이다.
예전에는 친구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고 누구와도 쉽게 가깝게 지냈다면 지금은 일정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일에 신중해졌다. 마음을 열고 가까이 지내고자 하는 필요성이나 동기를 일으키는 호르몬의 작용이 급격히 노쇠해진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람관계에 대한 접근법이 너무 염세적이고 다른 이들에 비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한 것이리라 나름 결론을 내렸었다. 만나서 시간을 나누는 사람들 수는 아주 적다. 그러나 모두 어떤 면으로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젊을 때와 같은 깊은 정이나 이끌림에 근거한 만남은 아니지만 다른 모양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다.
얼마전 우연히 알게 된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교성과 친화력이 좋은 분들이 몇 분 계셨기에 함께 만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는 자리에 자주 참석했었다. 호주에서 18년을 지내면서 한국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본 경험이 적었기에 처음에는 그들로부터 얻는 정보에 놀라며 그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나의 흥미는 가파르게 떨어졌다.
공유되는 주제에 더 이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겠기에 만남을 그만두었다. 그들만의 모임은 계속되고 있지만 미련이 전혀 없다. 몇 년간 함께 했던 독서모임도 정리했다. 1년의 고민 끝에 만들었던 독서모임으로 남다른 애정이 갔지만 발전 없는 독서방법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을 찾다가 인연이 된 사람들과 만든 모임이기에 계속 이어가는 자체로도 큰 의미가 될 수 있었으나 그러한 얄팍한 이유 때문에 쏟아 부어야 하는 나의 시간과 노력이 너무 귀중했고 그리고 나는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제한된 나의 역량을 그런 보이는 것에 신경쓰기보다는 실리적인 면에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무엇보다 책과 자신의 생각을 연결하여 읽고 글로써 완성하고자 했던 원래 목표와 점점 더 멀어지는, 단순히 읽은 텍스트에 머무는 토론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모임을 그만 둔 뒤로는 기대한 것보다 더 빨리 가볍게 관련된 모든 감정들을 놓았다. 사람들이 별다른 일없이 갑자기 모임에서 사라진 나를 의아해하며 이유를 궁금해 한다는 것을 안다. 이유를 밝혀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비겁함에 충분한 설명 없이 사라진 것에 조금의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나의 자리는 곧 잊혀지리라 본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을 하면서 왜 나는 그런 모임을 견디지 못하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약간의 자책하는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결론을 내렸다. 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일상의 대화가 조금은 다른,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자신만의 경험과 생각에 연결하는 사유의 여정을 나누는 것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성찰의 말들이나 단단히 고정된 관념을 바꿔줄 수 있는 지식과 시각을 공유하는 대화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의 기호만을 중심에 두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만남에 강하게 끌린다. 어찌보면 사람들과의 부딪침을 정의 나눔으로 보지 않고 이리저리 계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지하지 못한 추잡한 교만의 행로로 접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자극의 끌림을 바꾸거나 멈추고 싶지 않다.
<오십에 읽는 주역>에서 나이에 따라 주위에 있는 친구들을 가려야 하고 달라야 한다는 지적은 지금의 내 변화와 경향을 긍정적으로 지지해주어 기뻤다. “서남 방향에서는 친구를 얻어야 하고 동북 방향에서는 친구를 잃어야 한다”는 곤의 괘사는 젊은 시절에는 많은 친구를 만드는 일이 인생의 길에 도움이 되지만 나이 든 후에는 친구를 잃는 일 또한 하늘의 깊은 뜻으로 결국에는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어떤 행동이 불편한 진실에 근거하고 불쾌한 행동이 수반되는 일일지라도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에 짧은 안목을 가진 인간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격려한다. 주역에 심취하여 책이 뜯어지도록 읽었다는 공자는 “추구하는 도가 같지 아니하다면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남기셨다. 일전의 관계정리가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해본다.
<논어> 1장에 나오는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벗은 ‘우’가 아닌 ‘붕’이 쓰였다고 한다. 정신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벗이 찾아오니 기쁘다는 것이다. 매달 첫째 토요일에 있는 글짓기모임은 몇 안 되는 회원들이지만 만남이 기다려진다. 매번 글을 준비해 가겠다는 스스로 정한 다짐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더구나 글쓰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된 미숙함 때문에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심이지만 그렇게 준비해간 글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일은 항상 즐겁다.
밤시간에 함께 하는 인문학모임 또한 기다려지는 만남이다. 늦은 오후에 기차를 타고 얼마간은 걸어가야 하며 밤 11시 가까운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오지만 언제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간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쌓지 않았어도 그들과 동일한 것을 보며 공감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 자체로도 충분히 즐겁다.
젊었던 시절에는 결코 생각지도 못한 관계들이지만 지금은 이러한 관계가 편하고 충족감을 준다. 중국에 있는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또한 ‘붕’에 해당한다. 가끔 연락하고 1년에 한번 만나는 관계일지라도 그들과의 관계가 소중하고 나누는 정이 귀중하다. 각자 다른 나라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다가 짧게 만나지만 수련하며 보낸 경험을 나누다 보면 물리적인 거리와 떨어져 보낸 시간이 무색하게 마음이 연결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추구하고 걸어가는 길이 나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사유를 하다 보니 아직도 정리해야 하거나 만남의 횟수를 줄이거나 대화의 질을 바꿔야 하는 몇몇의 관계가 떠오른다. 지금의 흡족한 만남들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이유나 모습으로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글짓기 모임방에 올라온 한편의 시에서 시간을 두고 관계들을 정리할 때 가지면 좋을 도움이 되는 문장을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어라. 좋은 사람으로 만나고 착한 사람으로 헤어져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는 인연에 관한 글에서 기억의 저금통에 저장해둘 또 하나의 명언을 찾은 것이다. 어렸을 때는 관계를 정리할 때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오직 감정의 충실함만 있었을 뿐이다. 대부분이 분노나 불쾌함 아니면 비겁함인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곁에 있는 만남을 귀중하게 여기며 좋은 사람으로 머무는 일에 소홀했었고 헤어질 때 상처를 주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만남이 끝난 뒤에는 기억조차 지우려 했었다.
얼마나 어설픈 행동들이었는지! 깊은 후회가 남는다. 앞으로는 보다 현명하게 인연을 만나고 헤어지고 기억하리라 다짐한다. 만날 때는 앞뒤를 보지 못하는 뜨거움보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살펴주려 하고 헤어질 때는 상처를 덜 주도록 배려하는 말과 자세로 그래서 헤어진 후 어찌하여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어색함에 당황하기보다는 순수한 반가움에 환한 미소로 그 재회를 기뻐할 수 있도록 말이다.
글 / Daisy (글벗세움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