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만들기

일요일 아침 여덟 시 오분… 밤새 화장실 한번 안가고 곤히 잠들어 있던 훈이가 살포시 눈을 떴습니다. 순간 ‘심쿵!’입니다. 녀석이 저를 향해 특유의 그 살인미소를 날린 겁니다. 그리고는 떼구루루 굴러와(?) 제 품에 쏙 안겼습니다. “에이든, 잘 잤어?”라는 제 이야기에 “네!” 하며 고개를 끄떡입니다.

에이든은 제 팔을 베고 제 품에 안긴 채 5분쯤을 더 그렇게 있었습니다. 시계를 흘깃 한번 쳐다본 녀석은 “1분만 더 있다가 일어날 게요” 합니다. 이윽고 욕실로 들어가 치카치카를 하고 나온 녀석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쉴 새 없이 재잘대기 시작합니다. 녀석의 유쾌한 수다에 아내도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내려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새벽녘이 돼서야 두 시간 남짓 잔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 집에 오면 거실에 매트를 깔고 다같이 자는 걸 좋아하는 훈이 덕분에 그날도 거실에 자리를 폈는데 녀석의 옆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던 겁니다. 녀석의 쌔근쌔근 잠든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녀석의 뺨과 이마에 몇 차례 뽀뽀세례를 펼쳤습니다. 새삼스런 이야기이긴 하지만, 에이든은 쌍꺼풀도 없는 사내아이임에도 눈망울이 아주 크고 깊고 예쁩니다. 속눈썹도 마치 여자아이처럼 길고….

2주 전, 봄방학을 맞아 우리 집에서 슬립오버 (Sleepover)를 가졌습니다. 원래는 훈이와 봄이 두 녀석 모두 함께 하기로 했는데 봄이가 어쩐 일인지 그날은 ‘엄마껌딱지 병’이 재발해 중도포기, 이번 슬립오버는 본의 아니게 훈이의 단독무대가 됐습니다. 뒷마당에서 삼겹살 바비큐와 짜장면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온 에이든은 할머니가 챙겨준 간식을 먹으며 녀석만의 시간을 즐겼습니다. 어느새 아홉 살 반,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녀석은 이제 말 그대로 ‘따로 손 갈 일’이 없습니다. 웬만한 건 지가 다 알아서 하고 태블릿과 함께 하는 시간도 스스로 정해놓고 그 동안만 즐깁니다. 아기 시절, 기저귀를 차고 뒤뚱뒤뚱 보호펜스 안에서 놀던 녀석이 어느덧 의젓한 청년(?)이 된 겁니다.

우리의 원래 계획에는 이번 슬립오버에서 두 녀석과 함께 트레인을 타고 시티로 나가 오페라하우스 옆 로얄보타닉가든에서 할머니와 녀석들이 함께 만든 김밥도시락을 까먹는 프로그램도 들어있었습니다. 녀석들과의 추억 만들기 시간을 좀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우리는 에이든이 아장아장 걸을 때 로얄보타닉가든에서 가졌던 예쁜 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둘 다 ‘엄마아빠는 처음이어서’ 그리고 ‘우리에게 아이들과의 추억 만들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길라잡이가 없어서’ 아내와 저, 특히 저는 우리 아이들과의 추억 만들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 중요성을 깨우쳤더라면 저는 일에 미쳐(?) 지냈던 시간을 어지간히 줄여서라도 아이들과의 추억 만들기를 더 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때의 못다했음을 훈이와 봄이 두 녀석에게서 찾고 있는 건데 아기 때는 아기 때대로, 아장아장 걸을 때는 그때대로, 지금처럼 초등학교 3학년, 1학년일 때는 또 그때대로 녀석들이 주는 기쁨은, 그리고 녀석들이 간직하게 될 추억은 그 모양과 색깔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에이든은 점심으로 할머니가 만들어준 치즈오믈렛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평소 ‘할머니를 닮아 입이 짧다’는 놀림 아닌 놀림을 받는 녀석이지만 그날은 평소의 두 배 아니 세 배 정도의 양을 뚝딱 해치웠고 간식도 야무지게 먹었습니다.

1박 2일 동안 할배할매와 함께 했던 시간이 녀석에게는 충분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엄마가 데리러 온다’는 이야기에 녀석은 위층으로, 세탁실로 숨어보려 했지만 덩치가 너무 커져서(?) 쉽지가 않았습니다. 네 다섯 살 무렵, 우리 집에서 놀다가도 엄마가 데리러 온다는 이야기에 집에 가기 싫어서 그 작은 몸을 안방이며 식탁 아래로 숨기기에 바빴던 녀석의 모습이 떠오르며 흐뭇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평소 ‘손주바보’라는 놀림을 많이 받고 있는 저이지만 저는 녀석들이 더 많이 크기 전에 녀석들과 순간순간 만들고 교감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추억들을 많이 많이 만들고 싶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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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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