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나는 ‘초이 (Choi)’다. 이곳 사람들은 ‘최’를 ‘초이’로 발음한다. 그때 25년전, 아내와 딸아이를 이끌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밟은 뉴질랜드 오클랜드공항은 촌스러웠다. 보내고 맞이하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할 것으로 상상했던 공항의 풍경은 오수에 젖은 삽살개가 주인을 기다리는 고국 시골 간이역의 한낮처럼 한가했다.
마음 속에서 ‘뭐야 이거, 완전 시골이네’라는 실망과 함께, 이민 갈 나라 사전답사를 생략했던 것이 후회 됐다. 그렇지만, 한가해서였는지 내 이름이 적힌 종이쪽지를 들고 서있는 이민회사 직원이 금방 눈에 띄었다.
이민회사 직원은 난생처음 발 디딘 땅에 대한 한 줄 설명이나 안내도 없이 차를 몰아 모텔이란 곳에 내려놓고 ‘부탁할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명함 한 장 건네주고 가버렸다.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텔 주인은 한국사람이었다. 그리고 모텔에 묵은 지 보름쯤 되면서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한국인들이 드나든다는 것을 알았다.
자동차세일즈 하는 사람, 부동산사업자가 아닌 부동산 ‘소개해주는’사람, 자녀 학교 안내해주는 사람 등등이 모텔을 들락거렸다. 모두 한국사람으로 그들 말대로 ‘이민 선배’들이었다. 모텔 주인이 출입을 허락한 그들과 모텔 간에는 모종의 거래가 이뤄져 있음을 눈치로 알았다. 모텔 주인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들 사이에는 음흉스러운 일종의 짬짜미가 형성돼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경상도 억양을 구사하는 사람이 어찌 알고 내가 묵는 방을 찾아왔다. 싹싹하고 예의 바른 그는 이곳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주택구입이나 자동차구입을 도와주고 딸아이 영어교육에 도움될 학교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자동차세일즈맨도 아니고, 복덕방업자도 아니고,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먼저 이민 와서 경험했던 경험자’로서 ‘소개’만 한다고 했다. 각 분야에 정식으로 사업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므로 소개비는 ‘알아서’ 달라고 했다.
그는 뒷골목 길도 모르는 나에게 살갑게 ‘행님 행님’ 하면서 자동차도 사게 해주고, 딸아이 학교도 안내해주고, 집도 소개해줬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알아서’ 소개비를 넉넉하게 줬다. 후에 알게 됐지만 그는 자동차, 집, 학교 등을 소개해주고 해당업자로부터도 소개비를 받았다. 그가 받는 소개비는 내가 지불한 대금에 포함돼 있었다. 그는 내게서 건건이 두 번의 소개비를 받는 셈이었다.
각설하고, 그가 소개한 집을 샀다. 무엇보다 아내가 맘에 들어 했다. 모텔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는 날 그가 말했다. “이제 현지인과 어울려 살아야 합니더. 얘들은 한국사람 이름을 제대로 발음 하지 못합니더. 얘들은 한국사람이 영어이름 쓰는 걸 좋아합니더. 원숭이 나라에 왔으면 원숭이가 되야지예. 그래 지가 행님 이름을 지어왔다 아입니꺼. 찰스 (Charles)! 어떻습니꺼. 애칭은 찰리 (Charley)입니더. 근사하지예?”
찰리가 된 나는 앞집, 옆집, 뒷집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이웃이 됐다. 특히 덩치 큰 누렁개 두 마리를 집안에서 키우는 뒷집의 백인 노부부는 수시로 나를 초대해 찰리, 찰리 하면서 차를 대접했다. 나도 할머니가 좋아한다는 와인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날 밤도 일자리 구하기도 어렵고, 살아갈 일도 막막해 심난한 마음으로 늦도록 잠 못 이루며 뒤척거리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찰리’를 연속해 부르는 뒷집 백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무슨 일인가 싶어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손전등을 켠 백인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너 찰리를 부르는 게 아니야. 집 나간 우리 누렁개를 찾는 거야. 걔 이름도 찰리야.” 백인할머니는 다시 찰리를 부르면서 동네를 돌았다. 할머니의 개와 내 이름이 같다는 것이 황당했다. 그 후, 나는 영어이름을 버렸다.
테니스클럽에서든 골프장에서든 어디에서든 현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 나는 ‘최’를 고집한다. 발음이 어렵고 쉽고는 그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니다. 그들이 나를 ‘초이’라고 부를 때 나는 본래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어디에 살든 나는 나여야 하니까.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