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데이트

“나, 얼른 옷 갈아입고 올 게!” 유쾌한 이 한마디와 함께 종종걸음을 쳤던 그녀는 잠시 후 예쁜 차림으로 우리 집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까만 멜빵 스커트와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검정 구두로 한껏 멋을 부린(?)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귀엽던 모습에서 시크한 숙녀(?)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데이트… 길을 걸을 때도,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도, 숍에 들어갈 때도, 우리는 한시도 손을 놓지 않고 꼭 잡고 다녔습니다. 쉴새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귀여운 수다는 우리의 데이트를 더더욱 유쾌하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게 ‘그녀와의 첫 데이트’였습니다. 여럿이서 어울려 다닌 경우는 많았지만 그렇게 단둘만의 시간을 가진 건 그날이 처음이었던 겁니다.

“뽐아, 할배랑 나갔다 올까?”라는 말에 녀석은 벌써 신이 나있었습니다. 할배에 대한 사랑이 서서히 옅어져(?)가고 있는 훈이는 집에 남아 있기로 한 반면 요즘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최고조에 달한 봄이는 얼른 차에 올랐습니다. 아직은 부스터시트가 필요한 나이, 룸미러로 보이는 녀석의 얼굴에는 이미 기분 좋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이스트우드쇼핑센터에 주차를 마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낮에 삼겹살과 함께 먹을 양상추며 오이며 야채들을 담고 울워스에 들러 녀석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도 챙겼습니다. 정이 넘치는 녀석은 자기 거는 물론, 오빠 거까지 챙기는 세심함을 보였습니다.

“뽐아, 우리, 엄마한테 커피 한 잔 사줄까?” 한인타운으로 넘어오는 차 안에서 건넨 이 한 마디에 녀석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엄마는 아이스라떼를 좋아하고 사장님은 아이스롱블랙 사드리면 될 것 같아.” 언제 사장님 취향까지 꿰뚫고 있었는지… 그런데 이렇게 추운 날 아이스가 맞긴 한 건지…. 녀석은 커피를 들고 쏜살같이 지 엄마에게 달려갔고 뜻밖의 방문에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그곳 사장님은 녀석에게 맛있는 간식거리 두 봉지를 집어줬습니다.

번개 같은 짧은 만남을 마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정육점… “할아버지, 나, 이거 한 봉지는 이모한테 줄 거야.” 우리가 정육점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 계산대에 있던 여직원이 깜짝 놀라며 반색을 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한 자세로…. 알고 보니 그 두 사람은 죽고 못사는(?) 사이였습니다. 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간식거리를 내밀자 이모의 감동은 엄청난 사이즈가 됐습니다. “제가 봄이를 너무너무 좋아하거든요!” 우리의 고기봉투에는 국거리 한 팩이 일찌감치 ‘봄이 표 선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정육점 이모와의 해후를 마치고 나온 봄이의 얼굴도 발그레 상기돼 있었습니다. 정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여덟 살밖에 안된 꼬맹이가 어쩜 그렇게 생각도 깊고 마음 씀씀이가 넓고 사교성도 좋은 인싸 아니, 핵인싸가 돼있었는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녀석이 오래 전부터 가고 싶어했던 학교 옆 공원에 잠시 들르기로 했습니다. 방학기간이었지만 공원은 그리 붐비지 않았고 워낙 활동성이 좋은 녀석은 혼자서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에도 오르고 놀이기구 이것저것들을 한동안 신나게 즐겼습니다. 문득 녀석에게서 지 엄마의 어릴 때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중국타운 쪽에서 녀석은 저를 네 컷 사진관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곳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녀석은 어쩌면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곳 이용방법을 숙지해서 다음 데이트 때에는 녀석과 다정한 네 컷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뽐아, 우리 이제 점심 먹어야지” 하는 말에 아직은 한참 더 놀고 싶은 녀석은 아쉬움을 달래며 차에 올랐습니다. 그날 우리의 첫 데이트는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 계속됐는데 다음에는 시간을 좀더 늘려야겠습니다. “뽐아, 할배랑 또 나올래?” 하는 제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과의 데이트는 앞으로 기회가 닿는 한 최대한 많이 가져야겠습니다. 녀석이 할배를 좋아하는 마음이 충만할 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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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1956년생. 한국 여성지 <여원> <신부> <직장인> <젊은엄마> 기자 및 편집부장, 호주 시드니 <코리아타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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