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위해, 집 때문에

집을 옮기시려구요?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돈이 많으시다고요? 네, 부럽습니다. 나중에 연세가 더 드시면 수발해 주실 분이 계시나요? 며느리나 따님은 수발 대상자에 넣으시면 안되죠. 그들도 그들의 삶을 살아야 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가끔 찾아와 말동무 해 주는 정도라도 감지덕지 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아, 그렇다고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저세상 문 앞에 도달할 때까지 거치는 여정이 꽤나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어섭니다. 그런 얼굴 짓지 마세요. 주머니가 가벼워서 라구요? 글쎄요. 그나마 우리 친구들은 그럽디다, 호주 땅에 발 딛고 사는 덕에 노후 걱정은 말라고 말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재력이 있으시니 호주 정부의 자선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또한 남의 손을 빌리는 것에 하등 힘들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정부에 기대어 노후를 보내려니 체면과 현실 사이에서 하루 하루 엎었다 세웠다 하고 있습니다.

 

요즘 슬슬 죽을 때까지 머물 집을 찾는데 옆에서 그러네요. 85살이라고 생각하고 집을 사라고. 맞는 말입니다. 85세라면 호주에서도 운전면허증을 줄까 말까 고민하는 나이. 눈 검사, 신체 반응검사에 청력 검사도 한다던데,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는 얘기겠죠.  85세 늙은이가 집 관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제법 좋은 집, 깨끗한 집, 손을 댈 필요가 없는 집을 사려하는데 연세 든 형님들이 극구 작은 집을 사라고 하네요. 심지어 방 두 개도 크다고 합디다.

 

아이고, 선생님이야 일하실 분들을 부르면 되지만 저의 입장은 좀 다르지요.  요즘 인건비를 보면 앞으로 10년 후, 내 집 관리를 할 때 페인트 칠, 아니 비설거지는 제가 직접 해야 할 겝니다. 90살이 된다면 밥이라도 제대로 끓여 먹을까 걱정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집을 줄여 가야 하지만 자꾸 망설여집니다.

 

에구구, 방 두 칸에 주방이랑 쬐끄만 거실, 그런 집에서 어찌 살아요. 아내의 소프라노 섞인 잔소리가 벌써 귀에 쟁쟁 울립니다. 남사스럽게 어떻게 방 두 개짜리로 가요? 분명히 이렇게 첫마디가 튀어 나올겝니다.  넓은 집에서 작은 집으로 옮기면 주변에서 수군거려 뒷통수가 따가운 건 사실입니다. 장사하던 아들이 망해 집 팔아서 보태줬느니 딸이 사위랑 이혼하게 생겨서 이혼을 무마시키려고 집 팔았느니.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게 작금의 세태랍니다.  평생 벌어 모은 돈을 좀 쥐고 돈 자랑 하고픈 욕심도 있지요. 이렇게 마음을 다잡은 이유는 또 있답니다. 노인복지수당을 받으려니 집이 크면 안 된다고 하네요. 우스개 소리로 국가공무원이라고 불리는 노인복지수당이랑 집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묻자 그럽디다. 90세가 되면 집이 커서 관리 못해 팔아버리면 복지수당이 끊어진다고.

 

왜냐하면 10년 단위로 집값이 폭등하는 호주에서는 살던 집을 작은 것으로 옮기면 차액이 통장에 남아 고스란히 내 재산이 늘어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정부도 수당 수령인이 집을 팔아 현금재산이 통장에 남아 90여만불이 넘으면 노인복지수당을 스톱! 시킵니다. 숨기라구요? 어허! 호주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금융실명제가 한국에만 있나요? 호주는 오래 전부터 센터링크 시스템이 우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잊으신 것은 아니죠?

 

나는 은퇴 후 국가공무원이 되어 노인수당을 꼭 받으려 합니다. 구질구질하게 왜 그거 받냐고요?  에고,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가 받는 연금을 지금 은행 이자로 계산하면 무려 은행에 200만불 넣어두고 세금 뗀 돈을 받는 셈이라네요. 한마디로 철밥통을 끌어안고 사는 분들은 백만장자인 셈이지요. 거기에다가 지난 30여년간 내가 낸 세금이 얼마인데…, 그래서 꼭 받으려 합니다.

 

호주는 67세가 되면 재산이 90만불 까지는 1불이라도 생활비를 줍니다. 그 돈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많은 복지혜택이 있어서지요.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재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니 집이 커도 괜찮대요. 하지만, 방 5개짜리 집에 살다가 아이들 다 떠나고 두 늙은이만 남아 오두마니 큰 집에 있는 게 쓸쓸하겠죠?

 

그래서 미리미리 이사해서 준비를 해놓으려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열심히 돈 쓰고 살다가 나중에 병들어 너싱홈에 가게 되면 집을 맡기고 넉넉하게 지내다가 가려 하죠. 마누라가 먼저가도 나를 돌봐 줄 호주 복지시설이 있으니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큰 집으로 옮기려는 계획을 버렸습니다. 내 생각이 현명하지 않습니까?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넉넉잡아 30년 정도를 걸어가는 여정을 그려보며 잠자리를 준비해야겠습니다. 하루의 뜨겁던 해가 불루마운틴을 넘긴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일생이 꼭 하루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선생님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새벽과 아침, 점심과 퇴근시간이 지난 저녁 그리고 지금의 시간을 돌아보세요. 태양이 시드니 동쪽 바다에서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듯 핏덩이로 태어나서 세상물정 모르고 뛰어다니던 초등학교 시절. 청년기를 거쳐 세월을 몸으로 부딪치던 장년의 시간들이 어느새 지나가 버렸네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이제는 바람 한 점에도 고요를 느끼는 저녁 7시를 마악 지난 삶. 선생님은 9시쯤이 되었다고요? 아닙니다. 퇴근 후 제 2의 인생을 즐기던 한국인의 저력이 우리들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 이제 겨우 8시 라고 자부하십시오. 아직 늙기에는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습니다. 지난 30여년동안 애면글면 갚으려 애썼건만 이 집을 다른 이에게 보내야 한답니다. 더이상 덩그라니 남을 집에 애정을 훌훌 걷어버리고 남은 시간은 좀더 자유롭게, 넉넉하게 즐겨보려 합니다. 아직 8시가 되려면 조금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요. 선생님도 내 생각과 같으시다구요. 공수래공수거인데, 수고한 우리들에게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고 위로해주시고 좋은 꿈 꾸십시오.

 

 

장미혜 (캥거루문학회 회원·수필문학으로 등단·수필집: 오십에 점을 찍다·현재 시드니에서 회계사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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