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확인

황혼이혼이 심각한 일본에는 남편 옷만 만져도 두드러기가 돋고, 남편이 집 안에 있으면 소화가 안 된다는 ‘은퇴남편증후군 (Retired Husband Syndrome)’이라는 새로운 정신병리학용어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여성의 60%가 이 증후군에 시달린다고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썼다.

“은퇴 후, 그는 매일같이 아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애썼다. 백화점에서 아내의 손가방을 들고 서있기도 했다. 우아한 호텔에서 저녁식사도 자주 했다. 해외골프여행, 크루즈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주말이면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따라나가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그에게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었다. 서서히 아내의 존재가 즐겁고 감사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자신에게 아내밖에 없음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아내도 즐거워하는 듯했다. 그런데 딱 3개월이 되던 날, 아침식탁에서 아내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 이젠 제발 좀 혼자 나가 놀 수 없어?”

앞서 말한 김정운 교수가 쓴 책에 있는 내용이다. 이런 남편을 일본아내들은 ‘누레오치바’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 ‘젖은 낙엽’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쓸어도 쓸리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는 거다.

아내는 인간의 본성인 간섭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고 싶어한다. 그뿐인가? 자식들은 모두 머리가 커져서 자기 할 일에 바빠 아버지와 얘기 나눌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은퇴해 아내 곁에서 아내의 시중을 들어주면 아내가 좋아할 줄 알았다. 대화할 시간이 넉넉해 자식들도 반가워할 줄 알았다. 허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혼자 빈 집을 지키며 ‘나는 뭐지?’를 곱씹게 된다.

사회생활 할 때 사회적 지위가 임원이면 자신의 가치는 임원인 줄 알았고, 교수이면 교수인 줄 알았다. 헌데 사회생활을 접고 보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존재자체가 없어졌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인식 부재다.

고국에는 ‘꼰대’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고 한다. 서울 종로에 있는 탑골공원 (예전엔 파고다공원이라 불렀다)이 대표적인 장소다. 모여서 쓸데없는 넋두리를 하거나, 멍하니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거나, 장기판 옆에서 훈수를 두다가 멱살잡이를 하거나 ‘박카스아줌마’에 한눈을 팔면서 하루를 보낸다는 거다. 한마디로 할 일이 없는, 스스로 존재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생업에 몸담고 있을 때, 노동에 종사할 때,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낀다. 그러나 생업에서 제외됐을 때 지독한 존재의 상실을 체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업을 떠난 자에겐 생존하기 위한 또 다른 자기 존재의 의미나 치유가 필요한 것이다.

김정운 교수가 쓴 책에 의하면 세계 제2차대전의 영웅인 영국수상 처칠은 힘든 시간에 항상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국내정세가 어두워지고, 정적들이 공격하고, 심지어 아내가 쉬겠다고 혼자 떠난 크루즈여행에 부드럽고 잘생긴 신사가 함께했다는 불륜사실을 알았을 때도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는 거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그림 그릴 때 확인했다고 한다.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는 대통령 퇴임 후 전업화가로 변신했다. 그는 재임 중 만난 여러 람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다. 그는 자신이 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고 노무현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부시는 그림을 그릴 때 즐겁다고 했다. 부시 역시 자신의 존재를 그림 그리기로 확인하는 거다.

당신의 존재확인은 어떤가.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딱 붙어 구박이나 받는가?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면, ‘나는 나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면, 지나가버린 생업에 연연해하지 말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보라.

생업이 아니고 노동이 아닌 즐거움을 창조할 수 있는 일들, 조각하기, 글쓰기, 붓글씨 쓰기, 그림 그리기, 사진 찍기, 악기 연주하기, 탈 만들기 등등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빠져보라. 존재의 확인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 내 존재의 확인은 글쓰기다. 아무리 괴발개발 쓸지라도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Previous article명사 설명해주는 ‘~という(①~라는, ~라고 하는 ②~라고 말하다)’ 공부하기
Next article미셸 유의 미술칼럼 ⑮ 한국현대회화의 여명 밝힌 근·현대 화가 7인 장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