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뉴질랜드는 노동당 (Labour Party)이 여당이다. 제1야당은 국민당 (National Party)이다. 군소정당도 몇 개 있다. 노동당은 작은 정당과 손잡고 연합정부를 구성했지만,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2개 정당은 노동당과 국민당이다. 이들 두 정당은 정권을 잡았다 뺏겼다 를 반복한다.
놀라운 것은 이 두 정당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리질 않는다. 어쩌다 뉴질랜드 국회에서 진행되는 대정부질문 뉴스를 보면 마치 국회가 아니라 토론장 같다. 상대를 향해 삿대질하고 핏대를 세우면서 서류도 찢어 날리고, 막말과 고성으로 얼룩져야 국회 같은데, 그저 토론에 열중할 뿐이다.
내 영어가 신통치 않아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발언하는 의원의 표정이나 목소리로 생트집을 잡는지 아닌지 정도는 안다. 그래서인지 재미가 없다. 재미는 없지만 역겹지 않고, 짜증나지는 않는다.
재미로 따진다면 뉴질랜드 국회의원들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수준을 따라가기에는 한참 발 밑이다. 대한민국 국회만큼 재미있는 곳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처럼 아무 말이나 마구 지껄여대는 시정잡배 같은 인물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억지, 호통, 삿대질, 잘난 척하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진짜 재밌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의 행동은 배꼽 잡는 개그한마당이다.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상대를 빈정대고 헐뜯으면서도 절대로 ‘000의원!’이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아무리 흥분해도 반드시 ‘존경하는 000의원님!’이라고 호칭하는 아주 예의 바른(?) 풍경을 연출한다. 말은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이지만 행동은 전혀 ‘존경하는’것이 아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내가 배우고 익힌 바에 의하면 존경 (尊敬)은 그렇게 아무에게나 쓰는 말이 아니다. 사전적 의미의 존경이란 ‘우러러 받듦’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는 모범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에게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거다. 이를테면 나이와 상황에 걸맞는 원숙함, 여유로움, 욕망을 초월하고 갈등하지 않는 평온, 거들먹거리지 않는 겸손한 태도 등을 보여줄 때 존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거다.
헌데, 소리지르고 억지 쓰고 빈정거리면서도 자기들끼리 서로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이라니 어찌 내가 쓴웃음과 함께 화딱지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는 존경에 대한 모독과 더불어 말에 대한 가치를 폄하하는 저급한 정치인의 민낯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수준이다.
소설가 김훈은 그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서 국회의원들이 사용하는 말에 대한 가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국회에서 여야간에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물타기’로 쟁점을 뭉개버리면 여당도 야당도 손해 보지 않는다. 물타기는 쌍방이 죽기 살기로 물어뜯다가, 슬그머니 함께 물러서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나의 물과 너의 물을 섞음으로써 오염도가 평균화된 물을 공유한다. 너의 오염이 나의 오염을 희석시키는 생수가 되고, 나의 과오는 너의 과오를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제미! 그래서 ‘서로의 과오를 덮어주는 이불’이 되기 때문에 서로 존경하는가 보다.
말 (言)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를 소통하기 위한 소리’ 라고 했다. 또한 말은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낸다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 거다.
정말이지 나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인사청문회나 대정부질문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언행을 보고 듣다 보면 쓴웃음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대한민국 경제는 세계 선진국대열에 올라섰지만, 정치는 한참 뒤처진 후진국이라는 평가에 대해 나는 절대 동의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정치의 한가운데 서있는 국회의원들의 수준은 거론하고 싶지 않은 저질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누구의 말처럼 세상을 개탄할 만한 식견도 기력도 없다. 다만, 지들끼리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 어쩌고 하면서 싸움질하는 코미디 같은 모습을 보다 보니 하도 어이가 없고, 속이 메슥거리고, 약 오르고, 화나고, 열도 받쳐 몇 자 적어본 거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