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분이 메시아 되심을 깨닫고 그 속에서 그분을 발견해야
왜 예수님께서 왜 당신 스스로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자기노출’과 ‘자신의 과대포장’이 인간의 본능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과대 포장도, 허위사실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메시아 되심을 밝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01_판단의 기준
대답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눅 22:67).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시오.” “내가 말하여도 당신들은 믿지 않을 것이요.”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 예수님 본인도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보면 전혀 메시아로 보지 않을 거라고 이미 생각하셨던 것 같다.
전혀 범상하지 않고 너무나 평범한 집안 출신인 예수, 그를 누가 도대체 주목인들 했겠는가? 오히려 침례(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자격을 훨씬 더 갖춘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왜냐고?
일단 그는 좋은 집안 배경을 갖고 태어났다. 제사장 집안, 소위 종교 귀족 출신이다. 제사장인 아버지 스가랴와 아론의 후예인 어머니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출생했으니 더 설득력 있지 않은가(눅 1:5-25).
소위 ‘싹수 있게’ 출생하고 성장한 그에게 벌써 출세가도가 보이지 않는가?. 이런 요한이 ‘내가 메시아다’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 주목 받지 못하는 집안 출신에, 아버지도 불분명한 시골뜨기 예수가 ‘내가 여러분이 기다리는 메시아요’라고 말해본들 누가 믿겠는가? 오히려 콧방귀나 뀌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가치판단 기준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라 여겨진다.
02_제자들의 고백
필자의 생각으론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으신 데는 또 다른 숨은 의도가 있다고 본다.
예수님의 일상의 삶과 거듭되는 사역을 가까이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분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상과 일맥상통함을 쉽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고동락했던 그 분의 제자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경험하면서 다른 스승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실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사복음서는 제자들의 참회의 글이다. 만약 제자들이 살아계실 때 인간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했다면 그 분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 쓰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예수님의 어록인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최소한 30–40년 후에 쓰여졌다. 오랜 기간 동안 인간 예수의 행적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oral tradition)되었거나, 파피루스의 허름한 종이에 조각글 (fragments of words)로 전해졌다. 이것을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이 집필 동기에 맞게 수집하여 재편집한 (redacted) 것이 바로 오늘의 사복음서이다.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저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잠자며 3여 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육성을 직접 듣고, 가르침을 받은 문하생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조차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물론, 마태복음은 베드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16:16)로, 마가복음은 “그리스도”(8:29)로,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9:20)로, 요한복음은 색다르게 “하나님의 거룩한 이”(You are the Holy One of God, 6:69)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하는 순간, 다른 제자들은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이 고백을 한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의 처형 전날 밤에 세 번이나 그를 부인하지 않았던가?(막 14:66-72).
나머지 다른 제자들은 그 날 밤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요한복음은 “주님이 사랑한 제자”란 표현을 쓰면서,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있으나마나 한 존재,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 묘사될 뿐이다(요 19:26-27).
03_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간이 흘러 흘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께서 그들 속에 임한 후에야, 베드로의 고백처럼, 그들의 스승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야임을 깨달았다.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서 이 고백을 역사의 뒤안길에 조용하게 묻어둘 수는 없었다. 그들의 신앙 양심과 스승에 대한 기본 예의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우리가 베드로의 고백을 읽을 때, 제자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후회하는 한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성경을 제대로 맛깔 나게 읽는 것이다. 가만히 귀 기울여보라. 그들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우리는 그분을 구석에 밀쳐 두거나 벽장 안에 가둬 두어선 안 된다. 또 그분을 일요일, 교회, 성경, 삶의 종교 부분으로 제한하려 해서도 안 된다. 매 순간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분이 메시아 되심을 깨닫고, 그 속에서 그분을 발견해야 한다.
글 / 권오영 (철학박사· 알파크루시스대학교 한국학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