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삼오오 모여 점심식사를 하면서 깔깔대고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새삼 부럽게 다가왔습니다. 아직 심하게 춥지는 않은 날씨라서 그랬는지 식사를 마치고 저마다 커피 한잔, 대부분이 ‘아아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씩을 들고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도 저에게는 신선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한국에 며칠 있는 동안 ‘늦잠 매니어’인 우리는 늘 점심 때쯤이 돼서야 호텔 방을 나섰고 그들이 가장 많이 자리하고 있는 집을 찾아 들어 맛있는 ‘아점 (아침 겸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사람들이 북적대는 집을 찾거나 그도 아니면 기사식당을 찾아라.’ 아주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저의 맛집 찾기 매뉴얼입니다. 실제로 그런 집들은 맛이 있거나 가격이 싸거나, 운이 좋으면 두 가지가 다 적용되곤 했습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직업의 특성상 동료들과 한 자리에 모여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한 경우보다는 바쁘게 움직이며 한끼를 ‘때운’ 횟수가 훨씬 많았지만 어쩌다 생긴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는 지금 생각해도 소중하기만 합니다. 물론, 그 같은 자리들로 인해 아내와 두 아이들에게는 늘 미안했지만 말입니다.
한국에서 점심시간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는 직장인들을 보면서 문득 ‘나도 저 사람들 틈에 섞여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엉뚱한 생각을 가져봤습니다. 굳이 타고난 워커홀릭 티를 내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그럴 자격을 상실한(?) 저로서는 그들의 지금이 많이 부러웠던 것 같습니다. 속된 말로 날밤을 까면서, 가끔은 드물게 코피도 주르르 흘리면서 열심히 일했던 저의 그 시절들이 오버랩 됐습니다.
고교시절, 쉽게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와 씨름하며 밤을 새서라도 반드시 해결하고야 말았던 집념,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양질의 기사를 데드라인에 맞춰 써내야 한다’는 강박은 늘 제 곁에 함께 했습니다. ‘내가 떳떳해야 남에게도 당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은 철저히 다해놓고 마감시간에 쫓기는 후배기자들을 향해 그렇게 ‘지랄’을 떨곤 했던 것 같습니다.
시드니에서 <코리아타운>를 발행하면서도 저의 이 같은 신념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출근, 회사에서 제가 할 일을 끝내고 업무지시를 마치고는 점심시간 이전에는 자리를 비워줬던 일상…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가 일상화된 지금은 느낄 수 없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입니다.
이제는 그 숨가쁜 현장에서 벗어나 있는, 조금은 무기력해진(?) 제 모습을 보며 옛날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같은 저의 바램 혹은 생각은 대단히 이율배반적입니다. 저는 제가 60살이 되던 해에 공식적인 ‘은퇴’를 하고 싶었습니다. 회사사람들과 제가 열정적으로 키워놓은 <코리아타운>이 자타공인 정상의 자리에 올라있었고 제가 일선에서 빠져도 문제 없이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과 저런 변수들 때문에, 가장 결정적으로는 저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우물쭈물 하면서 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7년 전 아니 거의 8년 전에 이런저런 생각 하지 말고 과감히 떨쳐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때 저는 회사 일에서 98퍼센트쯤 손을 떼고 아내와 함께 호주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누비는 여행전문가로 변신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주 제가 쓰고 있는 ‘짧은 글, 긴 여운’과 세계 곳곳을 누비며 얻어지는 생생한 여행기를 <코리아타운>에 게재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려 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제는 저도 꾀가(?) 나서 여행기를 옛날처럼 열정적으로 쓰려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이런저런 것들 다 떨쳐내고 과감한 은퇴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자꾸 이율배반적인 사고에 빠져들지 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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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