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죄값을 묻지 않는다

바울 서신에 사용된 은혜는 많은 감정 축약하는 단어

흔히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은혜’를 자신의 다메섹 경험–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건–을 통해 새롭게 해석한다.

 

01_전환점, 다메섹 사건

그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바울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던 일이었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얼빠진 이야기로 취급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실 때 아마도 바울은 조롱하는 수많은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수의 죽음을 사회 질서를 문란시키는 범죄자의 죽음, 신성모독죄의 마땅한 결과로 생각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바울과 상관 없어도 모든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처형당하셨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과 상관 있는 죽음으로 받아들였을까? 바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부터이다. 그 사건으로 자신과 전혀 상관없었던 예수께서 자신과 너무도 깊이 상관 있는 존재로 재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전에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나사렛 동네의 촌뜨기 예수가 자신이 그토록 오래 기다리며 갈망했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핍박했다. 심지어 그들을 처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메시아를 만났다.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고, 그는 반문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니라”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박해하는 엄청난 죄를 지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욕되게 한 신성모독죄를 범했다. 이 죄값은 유대문화로 보면 당연히 십자가 처형이다. 바울 자신이 예수처럼 십자가에 처참하게 처형되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바울에게 어떤 죄값도 묻지 않으셨다.

 

02_용서와 화해의 선물

오히려 예수께서는 ‘용서 (forgiveness)’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처방전을 내리셨다. 바울의 예상과는 너무나 어긋난 처방전이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님도 엄청난 진노와 분노를 담아 처참한 형벌을 내리실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와 화해로 오히려 바울을 품으셨다.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자기의 죄를 용서받았을 때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상태로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오랫동안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자신의 죄 용서함을 구할 엄두조차 못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바울이 지은 죄값에 대해 ‘지불완료’라고 선언하셨다. “나의 목숨이 너의 죄값이었단다.” 예수께서는 바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며 따지지 않으셨다.

한마디로 충분했다. “바울아 네가 지은 모든 죄값은 이미 깨끗하게 지불되었느니라.” 바울은 놀라서 물었다. “주님!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오히려 반문하셨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는 아직 모르겠니? 네가 나를 그렇게 박해할 때도 나는 너를 한 번도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었단다.”

이것이 바울을 향한 예수님의 일방적인 ‘용서’와 ‘화해’의 선물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은혜 -결코 기대하거나 바랄 수 없는 선물–이다.

바울은 어떤 식이든지 예수님께 자신이 지은 죄 값을 지불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죄 값을 지불할 방법을 놓쳐버렸다. 자신의 죄 값을 되갚을 길은 전혀 없었다. 만약 바울이 죄값을 되갚으려는 순간, 더 이상 ‘은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되 갚을 수 없는 자신의 죄값 지불–을 은혜(grace: 헬, 카리스)란 단어로 축약해서 설명한다. 바울은 이 은혜를 대가 없는 선물 (free gift) 혹은 의의 대가 없는 선물 (free gift of righteousness)로 표현한다. 이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울 서신에 사용된 은혜는 많은 감정을 축약하는 단어이다. 회개의 눈물, 벅찬 감격의 눈물, 주체할 수 없는 감사의 눈물, 가슴이 쓰라리게 미안한 심정,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통회의 눈물, 냉랭한 가슴을 녹이는 따뜻함 등등.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서신을 읽을 때, 바울이 가졌던 그 감동, 그 감정, 그 감격, 그 느낌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서 의미를 묵상했으면 한다.

 

글 / 권오영 (철학박사·알파크루시스대학교 한국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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