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

“아야!” 아내가 발을 밟혔습니다.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쯤 됐을까 싶었을 때 우리 앞자리에 앉아있던 노부부가 우리 쪽을 지나 영화관 밖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앞쪽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려는 마음으로 맨 뒤였던 우리 자리를 통과했던 것이었을 텐데 어두컴컴한 상황에서 그 같은 일이 발생했던 겁니다.

임진왜란이 터진 지 7년이 지난 1598년 12월, 왜군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런 사망에 따라 왜군들은 황급히 조선에서의 퇴각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이순신은 “이렇게 전쟁을 끝내서는 절대 안 된다. 왜군을 완벽하게 섬멸하는 것이 이 전쟁을 올바르게 마무리하는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명나라와 ‘조명연합함대’를 꾸려 왜군의 퇴로를 막고 적을 섬멸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왜군의 끈질긴 회유와 뇌물공세에 넘어간 명나라 도독 진린은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려 하고 설상가상으로 새로운 왜군 수장 시마즈의 살마군까지 왜군의 퇴각을 돕기 위해 노량으로 향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영화 ‘노량’은 이 과정에서 왜군과 명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물밑거래 장면을 지루하리만치 오랫동안 보여주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큰 스크린에 영어자막만 나오고 한글자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상영된 노량에는 분명 한글자막이 들어있었을 텐데 영화관계자들이 호주교민들의 영어실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던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더군다나 영화의 성격상 관객들의 상당수가 영어와는 친숙하지 않은 고령층이었을 텐데 일본 말도 중국 말도 못 알아듣고 영어자막만 계속되는 영화는 그들에게 매우 불편했을 겁니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실제로 우리 앞자리의 노부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영화 초반에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노량’은 ‘명량’과 ‘한산’에 이은 이른바 ‘이순신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입니다. 세 편 모두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든 영화이지만 노량은 전작 두 편에 비해 초반의 지루한 전개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뭔가 부족함이 많이 느껴지는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서울의 봄’이 1300만 관객을 넘어 순항을 계속하고 있는 반면, 노량은 400만 고지를 힘겹게 넘어선 후로는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이용해 웅장한 전투장면을 다양하게 연출하긴 했지만 그리고 아무리 ‘이순신’이라는 흥행보증수표를 등에 업고 있긴 했지만 군데군데 부족함이 느껴진 영화였습니다.

요즘 제가 관심을 갖고 보는 한국 드라마 중에 KBS 2TV ‘고려거란전쟁’이 있습니다. 관용의 리더십으로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황제 현종과 그의 정치스승이자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강감찬의 이야기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는 대하드라마입니다. 32부작 중 중반을 넘어선 이 드라마에서 현종은 아직까지 찌질한(?)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강감찬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을 섬멸시키는 전개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수적으로 압도적 열세에 몰려있었던 최악, 극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거란군에 맞서 싸우다가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맞고’ 장렬한 최후를 맞은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의 모습에서는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가슴이 숙연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현종이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려 하자 “군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사옵니다. 그저 싸우라면 싸우고 지키라면 지킬 뿐이옵니다. 그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사옵니다. 다만 단 하나, 그들의 명예를 지켜주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헌데 폐하께서 그것조차 외면하신다면 고려군은 이제 무너질 것이옵니다”라 직언하는 강감찬 장군의 기개 또한 커다란 울림을 줬습니다.

총선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오자 서로 잘났다며 찧고 까불리고 이전투구, 이합집산을 계속하는 한국의 여야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기도 합니다. 같잖게 깜도 안 되는 인물에게 이순신을 들이대고 강감찬을 갖다 붙이며 호들갑을 떠는 작금의 행태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혀를 차게 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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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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