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하고 타이어 압력 조정까지 하며 꼼지락거렸지만 아직 30분이나 남았었다. 여유로움은 시골 캠핑의 한가로움을 미리부터 느끼게 했다. 아내가 ‘어, 캔디도 왔네!’하며 손을 흔들었다. 고작 한달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즐겁고 신나 하는 게 영락없이 애들 모습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삼 년 가깝게 중단되었던 캠핑이니 왜 아니겠는가. 약속된 시간이 되자 파나마와 코알라까지 4팀 8명 모두가 도착했다. 반가움과 안부 그리고 새로운 캠핑지에 대한 설렘과 수다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항상 반복되는 것이지만 만남으로 시작되는 즐거움은 캠핑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목적지까지 무선교신으로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주고받는 대화의 여정도 평소와 다른 이색적이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은 물론 보이지 않는 익숙한 목소리까지도 뭐든 새롭다. 그 느낌은 캠핑장까지 이동하는 두 시간 가깝게 지속됐다. 이번 드라이브는 생각보다 비포장 길이가 짧아 평온하고 깔끔했다.
도착한 오베론 댐 (Oberon Dam, 1943, 33.5m)은 NSW주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석유공장 물 공급을 위해 건설한 호주에서 가장 높은 판부벽댐 (Slab & Buttress Dam)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의 화천댐 (1944, 82m, 발전용)보다 소박한 규모지만 내륙의 깊숙한 곳, 한적하고 아담한 이 마을과 공업단지를 지금까지 존재하게 한 역할이 놀라웠다.
더욱이 오래된 전통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오베론 골프장을 보면서 모두의 호감이 증폭됐고 다음에 한번 더 방문해 골프를 겸한 캠핑을 하기로 했다. 늦어진 점심 해결을 위해 호수 가까운 숲에 텐트를 서둘러 설치했다. 코로나19로 중단된 캠핑 재개 한 달 만에 시작된 두 번째 캠핑이 오랜 오즈캠핑팀답게 왁자지껄하면서도 차분하게 시작되었다.
맥주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으며 벌어진 이야기 잔치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했다. 한 순간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면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붉게 물들어 빛나는 호수 위로 펼쳐지는 저녁노을은 넋이 나갈 정도의 황홀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곧이어 어둠이 점점 짙게 내려오면서 하나 둘 별들이 밤하늘의 농도에 맞추어 이곳 저곳에서 빠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우린 잠시 침묵했다. 환상의 노을과 어둠과 별들이 장엄하고 빠르게 교차하고 있었다.
13년 오즈캠핑의 상징, 구멍 뚫린 스테인리스 원통에 팀장이 불을 붙였다. 조용한 아름다움. 환상의 침묵에서 깨어난 순간이었다. 불의 쇼가 시작된 것이다. 1m 높이의 혀가 굵은 나무의 몸을 핥으며 널름거렸다. 오늘따라 캔디가 가져온 커다란 통나무가 만들어낸 불기둥은 모두의 얼굴을 붉게 익히며 강렬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불통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모두는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또 다른 침묵, 불멍을 즐기는 시간이 된 것이다. 그의 존재는 참 신기한 마력이 있다.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고 오직 활활 타오르는 강렬한 불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한참 동안 불의 신에게 붙잡혀 그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감당 못하는 몸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간격을 유지했고 따뜻한 온기는 우리 모두를 감싸 안았다.
평온하고 아늑한 밤, 그사이 화려하게 자리잡은 별들. 그들에게 우리는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차분해지고 감성적 소년 소녀로 바뀌어 나가면서… 이때쯤엔 가끔 알퐁스 도데 소설 ‘별’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과 주인집 소녀의 모닥불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내 하나 둘 각자의 와인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무 타는 소리는 툭탁거리며 조곤조곤 이야기에 리듬을 탔고 좌우로 가벼운 불춤을 추고 있었다. 시드니라는 도시를 떠나 이 한적한 산속 야밤에 매끄럽고 날카로운 불의 혀가 감칠 나게 통나무를 핥아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살아있는 생명체다. ‘세상의 모든 사람, 이렇게 잘생긴 이들이, 외로운 이민자가 아닌 평범한 삶이었으면 어땠을까?’ 옛 추억 가슴속 기억을 누군가 끄집어내놓으면, 각자가 알아서 담아내며 자신의 이야기로 끝없이 이어졌다.
파나마, 코알라, 캔디, 푸른산의 희로애락 (喜怒哀樂)들… 가슴에서 가슴으로… 아름다운 밤의 전령이 밤새도록 하늘에 수를 놓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스며들고 소실되어 가고 있었다. 그 여정 속 힘들었던 모습들 하나하나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별이 빛나는 Oberon 호수… 고요한 산속의 캠핑장 밤은 더욱 깊숙이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머리 위엔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밤하늘 가득히 채우고 있다가 갑자기 한꺼번에 우리 눈동자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전등을 껐고 모두는 숨을 죽였다.
“나 고상해지고 싶어!” (캔디 2)
“나 지금 유성을 봤어!” (파나마2)
“저기, 움직이는 별이 있네!” (캔디 2)
“그럼 뭘 빌면 되는데” (코알라 2)
“야 진짜 별이 빡빡하네” (캔디 1)
다들 술에 취한 건지, 별에 취한 건지, 아니면 불에 취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안고 들어온 텐트의 침낭엔 풀벌레 소리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자연의 땅바닥 굴곡을 온몸으로 느끼는 텐트 바닥. 언젠가 땅으로의 귀향을 깨닫게 하는 평온함의 하이라이트였다.
아침이 열리고 캠핑장은 조용했다. 물안개 자욱하게 내린 호숫가에 바위처럼 앉아있는 낚시꾼 어망엔 팔뚝만한 송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 토닥토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여기저기 부스럭거리며 텐트 지퍼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늘한 한기가 날아간 세탁기 불통 주변은 벌써 따뜻한 모닥불 온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기상나팔 소리도 없이 아침 불멍을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 돌아가면서 사과를 깎아 왔고, 커피를 가져왔고, 라면을 끓였고, 다 함께 호숫가 주변으로 산책을 다녀왔다. 점심을 끝내고 텐트를 걷고 주변 청소를 깔끔하게 끝냈다.
귀가 준비를 하면서 전날 밤 흐려졌던 눈들은 새로운 보약을 먹은 듯 어느새 빛나고 있었고, 몸은 활기찬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다. 불과 별빛의 정령을 온몸으로 가득 채운 우리는 시간의 빠른 흐름에 아쉬움을 그곳에 남겼고 또 다른 만남을 품었다. 별은 하얀 태양 빛 속으로, 불은 하얀 차 트렁크 속에 숨었다.
글 / 정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