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정지영 어머니 홍선성 여사

‘큰아들 이름으로 된 집’ 짓는 게 가장 큰 소원

이 내용은 <코리아 타운> 김태선 발행인이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매년 시행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역대 수상자 15명의 자식 사랑 이야기를 묶어 단행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자녀 예술가들이 어머니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는 1인칭 서술기법을 사용한 이 책은 단행본 사상 최초로 사진을 곁들인 잡지식 편집기법을 도입,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제 7년여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란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수록하며, 성공한 예술가 자녀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교민사회에 타산지석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

 

번듯한(?) 중견 영화감독, 하지만 어머니 사랑에는…

나의 어머니 홍선성 여사의 가슴속에 남은 한이 있다면 “우리 큰아들 돈 좀 많이 벌었으면…” 하는 소망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충족시켜 드리지 못하는 불효자로 남아있다.

어머니의 한 맺힌 작은 소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큰아들 이름으로 된 집을 갖는 것’이다.

작년에 누나와 자형이 일산에 땅을 사놓은 게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자형과 누나를 앉혀놓고는 1천만원을 내미셨다.

“집을 지을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일산 땅에 지으라고 했지? 여기 천만원을 줄테니 지영이 이름으로 집을 지어다오.”

그러한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마지막 소원이니 꼭 어미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듯싶었다.

누나와 자형은 조금은 당황스럽고 의아해 했다. 나는 만일 누나와 자형이 어머니의 돈을 안 받으면 집을 못 짓겠다고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일단 돈을 받아두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나를 볼 때마다 “꼭 네 이름으로 된 집을 마련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그럴 때면 나도 “올해 안으로는 꼭 짓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작년에도 그렇게 말했고 올해에도, 그리고 아마 내년에도 똑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내 이름으로 된 집을 지어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채워드리고 싶다.

장남에 대한 어머니의 소원을 내가 이뤄드리지 못한다면 그 한은 어머니의 유산으로 나의 가슴속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고맙다”는 생각만 든다. 어머니는 나의 성장기에 정신적으로나 교육적인 면에서 큰 영향을 주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자신의 다리품을 팔아 자식 농사에 충실하셨고, 한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오셨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사랑에 번듯한(?) 중견 영화감독인 나는 크게 보답한 것이 없었다.

 

“밥 많이 먹어라”가 어머니의 사랑 방정식

지난 96년, 어머니가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기쁜 마음보다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어머니가 장한 어머니상을 타시는 것은 내가 불효자라는 사실을 만방에 다시 한번 알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시상식장에서 수상소감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영화 만든다고 본인이 고생했지 저야 뭐 해준 게 있나요. 저는 그저 힘들어 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애태운 것밖에는 없습니다”라고 아들의 입장을 살려 주셨다.

한 평생 멋이라곤 모르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해오신 어머니이지만 나는 그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어머니는 지금도 자식들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시는 분이다.

“어머니, 제발 밥푸실 때 밥그릇 좀 넘지 않도록 해주세요. 요즘 그렇게 밥을 많이 담아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 가족들은 어머니가 밥을 수북하게 꼭꼭 눌러서 푸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밥을 수북하게 담으신다. 어머니는 자식이 상추쌈을 배부르게 먹는 것을 봐야 흡족하신 것이다.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밥 많이 먹어라”가 어머니의 사랑 방정식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가치관이나 인생관 등을 영향 받지 않고 자랐다. 삶의 지표나 인생관은 독서나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내 스스로 터득했다.

어머니는 부지런하셨다. 하지만 우리에게 부지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거나 강요하신 적은 없었다. 자식들을 위해 그저 열심히 돈을 버셨다.

어머니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가르치셨고, 자기희생을 통해 주위 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것에서 보람을 찾곤 하셨다.

어머니의 알뜰함과 강한 생활력은 선천적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유별났다. 어머니는 흔히 말하는 구두쇠는 아니었지만 돈을 무척 아끼셨다.

우리의 교복은 한 번도 맞춘 적이 없이 당신이 직접 만들어 주셨고, 몇 정류장 정도는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 그냥 걸어 다니셨다.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알뜰하신 분

장사를 하실 때도 쉽게 물건을 떼다가 팔 수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서 10원이라도 싼 곳이 있으면 강원도 산골이든 경상도 산골이든 가리지를 않으셨다.

새벽 차를 타고서라도 싸게 파는 곳을 찾아가 직접 신선한 채소나 과일을 사오셨다.

어머니는 그 무거운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는 산골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다시 시장에서 팔곤 하셨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다가 허리라도 다치시면 어쩌나” 싶어 여러 번 만류를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가 그렇게 악착 같은 생활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부자였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일을 하셨을 것이다.

늘 새벽 세시면 어머니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셨고, 30년이 넘게 그런 생활을 하셨다. 어머니는 일흔 여섯까지 장사를 하셨다.

늘 어려운 집안 형편이었지만 어머니는 신세 한탄을 하신 적이 없다. 6.25전쟁 이후부터 어머니는 근 15년을 청주에서 비단장사로 터를 잡았다. 어머니는 청주에서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서울 명문 대학에 보낸 억척스런 비단집 아줌마’로 유명하다.

공무원으로 청원군에서 근무하던 남편의 박봉으로는 시부모에 6남매의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라기 일쑤였기에 힘에 부쳐도 어머니가 직접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아버지가 가정적인 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인 짐도 대부분 어머니가 지셔야 했다.

더욱이 내가 대학 다닐 때는 큰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나이든 조카 두 명까지 떠안게 되셨다.

우리 식구만 밥 먹고 살기에도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나이 많은 조카들을 떠맡게 됐어도 어머니는 싫은 내색 한번 안 하셨다. 오히려 자식보다 조카들에게 더 신경을 써주셨고 결혼할 때는 혼수까지 다 장만해주셨다.

 

자식 잘 되는 게 삶의 가장 큰 목표

나의 어머니는 자식 잘 되는 것이 가장 큰 삶의 목표인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었지만, 다른 어머니와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더 큰 짐이 주어져도 불평하기보다는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셨다. 그런 면에서는 열려 있는 분이셨다.

어머니는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숙명으로 여기셨고 자식 키우는 것을 부모로서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충실하셨다.

어머니는 모든 선택과 상황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셨다. 어머니는 공부시켜서 자식 농사에서 성공하면 그것이 삶의 보람이요, 성공이었다.

채소나 과일 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그것도 모자라 머리에까지 이고 매일 수십리 길을 걸으시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러한 고생을 고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자식들을 위한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난 그런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 무한한 사랑을 어떻게 갚아 들일 것인가?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늘 기댈 수 있는 안식처였고, 어머니는 사랑의 원천임을 인식시켜 주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몸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는 것,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다만 이만큼 영화감독으로 출세했으면 돈도 남부럽지 않게 많이 벌어야 하는데, 그것을 극복 못하는 것이 한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 어머니의 작은 소망을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까?

제작감독을 해야 돈을 버는데, 내 스스로도 내가 만든 영화가 크게 흥행하리라는 생각은 안든다.

신자유주의자인 내가 추구하는 영화는 헐리우드식이 아니다. 나는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회라는 구조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앵글에 담고 싶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헐리우드식 영화보다는 사회구조적 장벽을 딛고 성공한 인간승리나 현실의 이면에 들어 있는 정신세계를 들춰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해 일반인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정서에 호소해야 하는데 ‘까’ 같은 경우에도 일반인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형식이어서 흥행에 실패한 것 같다. 하지만 객관적인 실패가 주관적인 실패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들이 이런 작품 만들었다!”

어머니는 영화감독을 하면 돈을 많이 벌줄 아셨다. 그래서 내가 영화계에 뛰어든다는 말에도 그렇게 크게 반대하지는 않으셨다.

어머니는 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보셨지만, 작품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으셨다. 영화의 흥행 여부를 떠나 “우리 아들이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어머니는 늘 흡족해 하셨다.

하지만 ‘남부군’이 흥행에 성공하자 겉으로 표현은 안 하셨지만 어머니도 속으로는 무척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희로애락이 분명하신 분은 아니다. 감정의 표현이 절제되어 있다. 가끔 화를 내실 때는 좀 무섭지만 감정에 변화가 거의 없는 분이시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오발탄’이란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원작과 시나리오를 모두 읽고 난 후 영화를 봐서 그랬는지 당시 영화를 통해 느낀 ‘오발탄’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얘기가 시나리오를 거쳐 저렇게 각색돼서 영화로 만들어지는구나”하고 소설을 영상화하는 과정을 한 눈에 알게 됐던 것이다. 한 마디로 영화의 맛을 느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화에 미쳐서 살았다.

영화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 하는 통에 성적이 떨어졌지만 어머니는 돈 벌러 다니시느라 아들의 성적이 떨어졌는지 올랐는지에 대해 잘 모르셨다. 그저 자식이 밥 잘 먹어 튼튼하게 자라는 것에 만족해 하셨다.

당시 나는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영화 볼 돈도 없었지만 나의 든든한 후원자(?) 청주중학교 동창 원상희 덕분에 실컷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현재까지도 나의 영화 작업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는 그 친구의 아버님은 대학 교수이셨는데, 우리는 그 분의 서재에 꽂힌 두꺼운 원서들을 헌책방에 몰래 팔아서 그 돈으로 영화를 보곤 했다.

 

공부 잘하는 아들, 틀림없이 법관이 되리라

영화감독이 나의 꿈이었기에 연극영화과에 들어가야겠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불을 보듯 뻔했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들이 틀림없이 법관이 되리라” 기대하셨다.

나는 먼저 누나와 사촌 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꼭 연극영화과를 가야 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반대를 하고 나섰다.

나는 결국 장벽을 넘지 못하고 영문과에 진학하기로 했다. 하지만 명문대학 영문과를 두 번이나 지원했는데 번번이 떨어졌다. 그래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시험을 쳤는데 과 수석으로 덜컥 붙어버렸다.

어머니는 “팔자가 그런가 보다”며 등록금을 대주셨다. 하지만 연극영화과를 1년 다녀보니 “이렇게 이론만 배울 바엔 차라리 책방에서 책을 보면 되지 뭣 하러 4년 동안 대학엘 다녀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려대 불문과로 편입을 했다. 1학년 때 영화 공부를 하다 보니 프랑스 영화가 깊이가 있어 보였고, 프랑스 영화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영화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대 재학시절인 68년 여름 찌는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당시 KBS 간부로 있던 이유황씨와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클 선배이기도 한 이유황씨를 찾아간 나는 준비한 시나리오를 불쑥 내밀며 “이만희 감독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의 이만희 감독은 당시 한국영화계 정상의 감독으로 영화지망생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나의 시나리오를 읽어본 이유황 선배는 “어차피 영화를 할 것이라면 연출보다는 나와 함께 시나리오를 하자”고 제의했고, 나는 한동안 그의 시나리오 조수 작업을 군에 입대할 때까지 계속했다.

 

3년 안에 영화감독 돼 독립하겠습니다

내가 영화작업을 다시 하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인 74년부터였다. 나는 졸업 후에도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감독위원회가 모집하는 영화지망생에 응시했다.

연출부문에는 모두 8명이 뽑혔는데, 6개월간의 단기 코스가 끝난뒤 나는 이만희 감독의 조감독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만희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나는 갈 곳을 잃고 말았다. 그때 평소 친분이 있던 차현재가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다.

그러한 인연으로 차현재는 퍼스트로, 나는 세컨으로 김수용 감독 문하에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내가 조감독으로 참여한 첫 작품은 김수용 감독이 75년에 만든 남궁원, 윤정희 주연의 ‘내일은 진실’이었다.

감수용 감독이 흥행감독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이라 나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막역한 친구인 이황림 감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와 나는 한마디로 ‘잘 나가는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내가 조감독에서 감독으로 빨리 진출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있고 어머니와 아내에게 한 약속 때문에도 계속 조감독 생활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 취직도 안된 상태의 나는 어머니에게 “3년만 기회를 주시면 영화감독이 돼 독립하겠다”고 약속했다.

결혼까지 해서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집안의 재정적인 부문은 어머니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나가 밤 늦게 들어오시는 어머니의 주름살이 나 때문에 더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결국 어머니와 한 그 약속은 3년 후가 아니라7년 후에야 지켜졌다.

 

영화감독 됐으니 돈 많이 벌거라 믿었던 어머니

그렇게 꿈꿔온 영화감독이 됐지만 감독이 된 후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여전히 어머니에게 있어 나와 아내는 짐만 더해주는 존재였다.

어머니는 내가 영화감독이 되자 매우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영화감독이 되면 돈을 많이 벌 줄 아셨다.

아들이 영화감독으로 데뷔는 했지만 돈과는 먼 길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알지 못하셨던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라는 작은 믿음을 어머니는 갖고 계셨다. 하지만 신인감독이 돈 보따리를 만져볼 기회란 요원하기만 했다.

결국 보다 못한 아내가 팔을 걷어 부치고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끊임 없는 불효에 아내까지 고생시키는 입장이 됐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내가 ‘남부군’을 준비하던 해에 76세를 일기로 폐암으로 세상을 뜨셨다.

내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은 81년 합동영화사가 만든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였다.

패션모델로 당시 정상의 인기를 끌던 윤영실과 여배우 오수미 자매의 캐스팅은 제작 초기부터 큰 관심을 모았고 이들의 상대역은 신일룡이 맡았다.

영화 ‘화려한 외출’, ‘여자의 함정’ 등 잇단 흥행 히트작의 조감독으로 일했던 경력 덕분에 여기저기서 영화제작 의뢰가 이어졌다.

나는 그 무렵 안정효씨의 소설 ‘하얀전쟁’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동경영화제에서 작품상까지 타는 경사를 이뤘다.

이어 역시 안정효씨 소설 원작인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영화화 했는데, 나는 ‘남부군’에서 ‘하얀전쟁’ 그리고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으로 청룡영화상, 백상예술상, 대종상 등 국내의 유수 영화제에서는 물론, 동경영화제와 싼세바스찬국제영화제 등에서도 상을 받았다.

 

여전히 부지런하신 어머니를 나는 사랑합니다

이 무렵부터는 나도 영화계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한 감독’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돈 많이 벌어다 주는 성공한 아들도 아니었고 팔 다리를 잘 주물러드리는 효자도 아니었다.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러하시겠지만 나의 어머니는 자식 하나 바라보고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며 사셨다.

또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분이어서 한시도 가만히 계시지를 못하신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임에도 아직까지도 집안 일을 거드신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밖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나를 보시더니 다짜고짜 “이제 큰아들 얼굴 봤으니 죽어야지. 다 필요 없다, 필요 없어!”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남동생이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척추를 다쳐 한동안 병석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동생 집에 가셔서 일을 도와주셨는데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아침 잠이 없는 어머니는 새벽부터 청소에 밥짓기, 설거지, 빨래 등을 도맡아 하셨다.

그런데 동생네 식구들한테는 어머니의 그 부지런함이 오히려 불편함이 됐던 모양이었다. 가끔씩 깔끔하지 않게 된 설거지나 빨래 등에 대한 불평도 나왔다고 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서 존재가치를 느끼며 자식 키우는 보람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로서는 그런 소리가 몹시 충격적이었고 서운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하기를 좋아하신다. 그 때문에 가끔씩은 내 아내에게도 어려운 존재가 되시기도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건강하게 뭔가를 위해 항상 움직이고 계시다는 게 행복하다.

‘큰아들 이름으로 된 집을 장만하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신 나의 어머니. 오늘도 나는 어머니의 작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충무로로 발길을 향한다.

“어머니, 이 못난 큰아들이 꼭 돈 많이 벌어서 제 이름으로 된 집도 사고, 어머니 호강도 시켜 드릴께요. 오래 오래만 사세요!”

 

어머니가 주신 변함없는 가르침 일곱 가지

 

  1. 정직하게 벌어라

어머니는 일생 자신의 다리품을 팔아 돈을 버셨다. 자식 농사에 충실하기 위해 어머니는 새벽 3-4시면 일어나셔서 밖으로 나가셨다. 그런 생활을 30년이 넘게 하시면서도 결코 남에게 손해를 입혀가며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1.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 돼라

워낙 부지런하고 남다른 분이라 어머니는 자기 희생을 통해서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에서 보람을 찾곤 하셨다. 우리에게도 존재의 의미를 가족이나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 되는 것에서 찾도록 가르치셨다.

 

  1. 절약 하라

어머니는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서 몇 정거장 정도는 그냥 걸어 다니셨다. 경로우대증이 있기 전까지는 버스를 잘 안타셨다. 쉽게 물건을 떼다가 팔 수도 있지만 10원이라도 싸면 그곳을 기어코 찾아가셨다.

 

  1. 건강 하라

어머니는 지금도 자식들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분이시다. “밥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다”고 생각하신다. “무슨 일을 하든 건강이 따라주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없다”며 늘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1. 부지런 하라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분이셔서 한시도 가만히 계시지를 못한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이지만 아직도 집안일을 거드신다. “사람은 할 일이 없을 때 병이 난다”며 조그마한 일이라도 당신 손으로 직접 하시려 든다.

 

  1.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살림에 큰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조카 두 명을 떠안게 된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는 싫은 내색 한번 안 하셨고 우리 6남매보다 오히려 조카들을 더 위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조카들이 결혼할 때는 혼수까지 직접 장만해주셨다.

 

  1.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늘 어려운 집안 형편이었지만 어머니는 신세 한탄을 하신 적이 없다. 열심히 노력해서 6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내셨다. 어머니는 모든 선택과 상황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셨다. 고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한결 견디기가 쉽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후배 예술가들에게 주는 조언 일곱 가지

 

  1. 효도 하라

나는 늘 어머니에게 빚만 져왔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직 나에게 주실 수 있는 사랑이 남아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큰아들 이름으로 된 집을 갖는 것’이다.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꼭 내 이름으로 된 집을 지어서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채워드리고 싶다.

 

  1. 명예를 위해 살라

부모님은 내가 돈과 명예와 권력을 모두 얻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나는 돈이나 권력보다는 영화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진정한 감독이 되고자 명예만을 좇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 대해 나는 후회가 없다. 내가 추구하는 영화가 돈을 못 벌더라도 나는 만족한다. 헐리우드식 영화보다는 이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의식과 헤게모니를 파헤쳐내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1. 꿈을 가져라

나는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오발탄’이라는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나는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나의 모든 인생을 투자했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꿈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1. 개성을 인정해줘라

나는 여러 명의 영화계 대가들 밑에서 영화수업을 했지만, 그들 중 자신의 세계를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또한 후배들에게 나의 세계관과 철학을 주입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에게서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지원해줄 뿐이다.

 

  1. 자존심을 지켜라

감독 데뷔시절 ‘내일의 비’의 감독으로 들어갔으나 제작자와 작품에 대한 견해가 달라 감독을 포기하고 나왔다. “신인감독 주제에 건방지게 제작자의 요구를 거절했다”며 다른 영화사에서도 써주지 않아 한동안 애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이든 ‘자신이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선’만은 지킬 수 있는 자존심이 필요하다.

 

  1. 객관적 실패가 주관적 실패는 아니다

영화 ‘까’가 흥행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작품이 형편이 없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영화 한편 한편을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객관적 실패가 곧 주관적 실패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1. 사회를 이끌어가는 자연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저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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