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소한 바람 ①

써 온 분이 천천히 마무리하세요라고 말해줬으면…

글 모임에 참석해 내가 써간 글을 읽다 보면 가끔은 목이 잠기고 코끝이 매워 올 때가 있다.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 각별히 애를 쓴다. 조금이라도 뜸을 들이면 ‘배려심 깊은’ 누군가가 내 글을 대신 읽어줄까 봐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다.

 

01_옆에 앉은 노 회원이 글의 다음을 읽어나가기 시작…

오래 전 일이다. 어느 글쓰기 모임에서 여성회원이 10대 아들을 주제로 글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대학을 진학해야 할 나이에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겠다니 고충이 컸던 것 같다. 글의 초반을 담담하게 읽어가던 그녀가 중간쯤 목이 메는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어엿하게 자기 몫을 하며 사는 아들이 대견하고, 어려운 시간을 잘 넘긴 자신에게 고마움으로 뒤섞인 감정이었겠다. 여인이 명치에 손을 얹고 목청을 가다듬는데 이삼 초 정도 지난 것 같다. 정말 그 정도였던 것 같다.

옆에 앉은 노령의 회원 한 분이 글의 다음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셨다. 손바닥에 놓인 자기의 알사탕이 누군가의 입으로 ‘쏙’ 하고 들어가는 걸 본 것처럼 젊은 여인은 어리둥절했다.

 

02_글 모임 있는 날 새벽, 내가 버틴 시간 위로하는 독백

이런 상황에서 누구라도 ‘내 글은 내가 읽겠다’고 했다면, 도리어 어른의 호의를 거절하는 고집스러운 아이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녀는 노 회원이 글을 읽는 동안 그분이 들고 있는 종이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적힌 이 말은 한 토막 분량의 수필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읽고 고치는 과정을 되풀이한 후, 내가 쓴 글이 프린터를 통해 두 장의 종이로 손에 들어오면 ‘수고했네, 수고했어’ 대개는 글 모임이 있는 날 새벽, 책상 앞에서 내가 버틴 시간을 위로하는 독백이다.

 

03_낭독시간이 되면, 하객의 눈이 신랑 신부에 쏠리듯이…

완성된 글은 회원 수만큼 복사해서 운전석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다. 단장을 하고 학예회에 나가는 어린 딸을 보는 것 같다. 자신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 외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낭독시간이 되면, 하객의 눈길이 신랑과 신부에게 쏠리듯이 문우들은 글 읽는 사람을 주목한다.

자신의 글을 읽던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설령 바닥에 뒹굴고 곡을 한다고 하면, 그것마저도 채운 것들을 밖으로 풀어내는 순환, 그리고 막힌 것이 뚫린다는 치유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복받치는 감정이 오 분을 넘기겠나, 십 분을 넘기겠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글을 대신 읽어달라고 부탁 받은 경우라 해도 ‘써 온 분이 천천히 마무리하세요’라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내게는 그런 사소한 바람이 있다.

이런 시시한 일에 평범한 사람들은 마음이 상하기도, 순해지기도 하는 것 아닌가. 올해 초, 코로나19 대란으로 혼비백산한 일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육 개월이 훌쩍 지났다. 시월 즈음이면 글 모임 벗들을 다시 만나게 되려나…. 내 작은 바람과 함께 이 아침,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글 / 박해선 (글벗세움 회원·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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