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율아!

이 글은 너의 할아버지의 막내동생, 그렇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항용 부족한 작은할아버지가 너에게 남기는 처음이자 마지막 글 일거다.

사실 너가 성장해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글이란 사라지지 않고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머무는 생물이니까 혹시 너가 이 글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이렇게 쓰는 거다.

나는 너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너를 직접 보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히 너를 직접 못 볼지도 모르겠다. 너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보내주는 동영상으로 너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을 뿐이다.

동영상으로 보여준 너의 꼼지락거림은 탄생의 기쁨과 환희로 황홀했다. 너가 몸짓으로 보여주는 생명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신비스러움 일뿐이었다.

그런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뒤뚱뒤뚱 걸음마 하는 한살이 됐구나. 축하한다. 너의 삶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삶’이길 기원한다.

너가 ‘어린 공주’로 태어나 ‘아율’이라는 이름을 얻고 세상과 처음으로 만난 날은 너의 삶의 시작이다. 싫든 좋든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너가 안고 가야 하는 너의 삶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숙명이라고 한다. 삶이란 너에 의해서, 너를 위하여, 너의 눈으로 만난 너의 세상이다.

어떻더냐? 처음 마주한 세상이 근사하더냐? 하긴 시간이 더 많이 흘러야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너는 너의 삶을 보듬고 스스로를 책임지는 성인이 되어, 너가 태어난 그 시간을 기억하고 그 의미와 깊이와 가치를 음미하게 될 것이다. 너가 세상의 삶을 인지할 수 있을 때, 너가 마주하며 살아가는 너의 세상이 깨끗하고 밝고 정의롭다고 자랑하는 세상이길 간절히 바란다.

성인이란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격적 주체다. 그런 인격적 주체인 너의 눈 아래 펼쳐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답답하고 그늘진 적막이 아닌 ‘어린 왕자’의 세상을 닮은 어린 공주의 아름답고 밝고 황홀한 세상이길 기원한다.

그런데, 아름답고 밝고 황홀한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바오밥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켜보는 눈물 나도록 고운 붉은 노을일까? 모래언덕을 환하게 밝히는 둥근 달일까?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 많은 행성들일까? 아니면 새벽을 깨우는 새들의 고운 노래 소리일까? 진정으로 아름답고 밝고 황홀한 세상이란 대체 어떤 세상일까?

너가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스펙트럼의 세상일지 모르겠다만, 바오밥나무나, 노을이나, 둥근 달이나, 행성이나 그런 것들과 더불어 정의와, 진실과, 성실함과, 아낌과, 나눔이 가득한 삶에서 아름답고 밝고 황홀함을 느끼는 세상이면 참 좋겠구나.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상의 잘못된 것들에는 분노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너는 옳은 것은 옳다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줄 아는 정의롭고 양심에 충실한 사람이면 좋겠다. 너가 있는 너의 자리에서 너가 해야 하는 것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한치의 빗나감도 없는 바른 행동에서 떳떳함을 배우고, 그런 삶의 당당함을 포기하지 않는 너이길 바라는 거다.

너가 세상의 중심에 서있을 때는 어쩌면 지구를 여행하듯 우주를 산책하는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럴지라도 산다는 건 내가 사는 지금이나 너가 살아갈 그때나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고독을 벗어날 진정한 방식을 외면한 채, 지배, 소유, 추상적 지식, 현실도피, 혹은 타인에 의한 자기 확인, 그 못되고 헛된 욕구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려 애쓰고 있을 거다.’

하지만 너는 어린 왕자처럼 보이지 않는 진솔한 것들을 볼 줄 아는 샘 깊은 어린 공주가 되길 바란다. 깊은 샘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인간관계의 가증스러움을 넘어선 ‘기초적인 진실성’과 성실성이다. 진실성과 성실성은 사랑이며 아낌이다. 사랑과 아낌의 뿌리는 참을성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설법하는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있어.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쌩떽쥐베리는 여우의 입을 빌어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참을성 있는 노력과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를 이렇게 표현한 거다. 그런 것들이 의미와 무의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바로 진실성과 성실성이다.

아율아! 너에게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친구를 존중하고, 이웃을 아끼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공경, 사랑, 존중, 아낌 이라는 말들은 인간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갖춰야 할 근본이니까.

언젠가 너 스스로 너의 삶이 아름답고 밝고 황홀하다고 느낄 때, 내가 보낸 이런 말들이 바로 너 자신이 되어있음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너가 되어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겠다. 그래, 내가 말한 이런 모든 것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삶’인 거다. 내가 그렇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나는 항용 부족했다.

프란츠카프카가 말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해 뜨고 해지는 하루하루가 너의 소중하고 사랑스런 삶이 되길 기도하겠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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