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미운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쉬운 말로 ‘하는 짓이 밉다’는 거다. 그런데 개인, 단체, 사회, 국가를 막론하고 미워하면 미워할 수록 자신만 피곤해진다. 미움 받는 상대는 오히려 편안하다. 삶의 부조화다.
나는 미워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놓아보려고 2주일 넘게 세상살이에 눈과 귀를 닫고 밤이면 술만 마셨다. 낮에는 그립고 따뜻한 노래를 들었다. 그런데 밉든 곱든 고국 소식이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다시 열어본 인터넷에는 여전히 미운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안온하고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더 많다. 특히 정치권은 여전히 미운 사람들로 요란하다.
지난달, 5월 1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창길이라는 기자가 쓴 기사는 짜증과 미움에 더해 분노까지 치솟았다. 기사 내용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2주년을 사흘 앞둔 지난 7일 대통령실 대외협력비서관실에서 전화가 왔다. 1면에 작게 들어간 윤 대통령의 얼굴 사진이 위와 아래가 잘려나가서 유감이라는 내용이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지금 내가 사는 나라가 북한이 아닐 터인데…. (중략) 대한민국 대통령의 얼굴 사진에 대한 언론보도지침을 대통령실이 따로 마련해놓은 것일까?
통화한 대외협력비서관실 직원은 해당날짜의 신문에 야당지도자 사진은 윤 대통령에 비해 이미지가 좋다는 언급도 덧붙였다. 어린이날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배우자 김혜경씨의 유튜브 캡처 이미지였다. 글쎄… 대통령의 이미지를 야당지도자와 비교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 아니던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취임 첫날을 다룬 2017년 5월 11일자 경향신문 지면을 살펴봤다. 사진 4장이 실렸다. 이중 3컷은 문 전 대통령의 머리 부분이 잘려나간 사진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미지에 대한 대통령실의 감각이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우상화하는 북한 정권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초상 사진이 걸려있는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지도자의 모습이 잘려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이미지를 실재와 혼동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석했던 북한 응원단의 해프닝을 기억하는지? 거리에 걸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담긴 현수막이 비를 맞고 있다며 눈물을 흘리고 사진을 회수하던 북한 응원단의 모습 말이다.’
기사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그 비서관은 윤 대통령에게 엄청 아부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미워하는 인간 군상 중 하나다.
내가 고등학생 때 반에 부자라고 소문난 녀석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몇 명의 녀석들은 녀석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잡담을 나누며 소란했다. 녀석은 자기 집 자랑 부모 자랑 미국에 유학간 형 자랑 누나 자랑으로 입에 침을 튀겼다.
주변에 모여든 녀석들은 우와! 굉장하네! 등등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아첨을 떨었다. 녀석은 점심시간이 되면 아첨꾼들을 수시로 구내식당으로 데려가 우동을 사줬다. 녀석은 스스로 두목 행세를 했다.
그 자리에 끼지 못한 다른 녀석들은 끼어든 녀석들을 알랑방귀뀐다며 빈정댔다. 알랑방귀는 알랑거리며 남의 비위를 맞추는 짓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기자가 언급한 대통령실 대외협력비서관실 그 직원은 알랑방귀를 뀌는 거다.
알랑방귀에 관해서 내가 어렸을 때 들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이 나라 할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지금의 대통령경호처장 격인 경무대 경찰서장인 4.19의 원흉 곽영주가 “각하 시원 하시겠습니다” 하며 아부를 했다는 거다. 그리고 실제로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막강한 권력남용으로 월권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다. 사실인지 아닌지 이승만 정부를 폄훼하는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아부의 실체적 모습이다.
아부는 실재를 조작한다. 실상이 아닌 조작된 허상으로 우상을 만드는 거다. 역사는 그렇게 우상을 만드는데 앞장섰던 인간들이 우상을 등에 업고 백성들을 어떻게 핍박했는지 알려주고 있다. 우리의 우상은 결국 포악한 독재자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노 철학자교수가 아부에 대해 말했다. “인격이 모자란 사람은 이기적인 관심이 많아지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윗사람에게 아첨을 하게 돼요. 아첨하는 사람만큼 불행하고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1950년대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조지 오웰’은 <1984>라는 소설을 통해 조작에 의한 공포와 인간의 황폐함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은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미래에 대해 예언하는 소설로서 사회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반유토피아적 문학소설로 집필’되었지만, 소설 속에서 당은 과거의 역사를 변조하고, 사실 기록을 지우고, 현실을 거짓 뉴스로 조작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근자에 한 해병 병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최고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국방부조사본부와 군 장성을 동원해 모르쇠와 거짓과 아첨으로 진실이 조작되고 있다. 미움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낀다.
최고권력자에 빌붙어 국민들에게 사실과 진실을 당당하게 알려야 할 언론에 조작을 강요하며, 자존심 없는 소아적 편협된 충성심에 매몰된 내시집단의 아부에 기자의 말처럼 나도 머리가 아찔하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