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과 죽음은 필연이다. 죽음은 자연의 섭리라고 한다. 내 어머니는 세상 떠나기 전 날밤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넜다. 모습은 더없이 평온했다. 내 어머니의 죽음은 끌려가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었다. 내 어머니의 죽음은 조용한 이별이었다.
삶은 잠시도 쉬지 않고 물결치듯 흘러간다. 나는 정해생 (1947년)으로 머잖아 80이 된다. 살면서 쌓인 욕심도 미움도, 후회도 미련도, 아픔도 모두다 지울 나이다. 지금 죽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살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만큼 살았으면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청춘은 힘들었지만, 나의 노후는 더없이 평안하고 행복하다. 먹고 자고 움직이는 하루하루가 금수강산이다.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죽음을 경험한 순간들이 있다. 고등학생 때 무릎이 깨졌다. 돌팔이의사는 깨진 무릎을 엉뚱한 위치에 붙여버렸다. 붙어버린 무릎 뼈를 떼어내 제자리에 붙이는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대에 눕자 팔에 주사바늘이 꽂혔다. 순간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황홀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수년 전 탈장으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대에 눕혀지고 그 옛날 무릎 수술 받을 때처럼 팔에 주사바늘이 꽂히자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은 황홀함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인위적이었지만 내가 경험한 죽음이었다.
나는 그렇게 ‘황홀한’ 유사 죽음을 경험한 탓인지 죽음에 대한 큰 두려움은 없다. 막상 닥치면 어떨지 모르지만. 다만 내가 바라는 죽음은 누구나 소망하듯이 내 어머니처럼 하룻밤 사이에 잠 자듯 죽는 거다.
사람들은 100세시대라는 희망고문 속에서 살아간다. 나이 들면 먹고 자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온통 오래 사는 것과 연계돼 있다. 그것만이 남은 유일한 인생목표라는 듯 살아간다. 어떻게든 안 죽으려고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목표가 되는 순간부터 육체의 작은 변화에도 전전긍긍 좌불안석하는 성가신 병에 걸려버린다. 오래 살겠다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다.
나는 감사하게도 건강보조식품을 복용한 적이 없다. 매년 정기적으로 받던 건강검진도 3년전부터 중단했다. 그렇다고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알면 걸리는 성가신 병이 싫어서다. 이젠 설령 신체부위와 장기부위에 이상이 있다 해도 호들갑 떨지 말고 자연에 맡기자는 마음이다.
인생을 마음먹은 대로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통계에 의하면 90세가 되면 100명중 기껏 5명 남고 95명은 저세상으로 간다. 죽고 나면 다 먹지 못한 온갖 영양제만 한 보따리 남아있을 뿐이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이어령 교수는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거다. 죽음은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태로의 귀환이다.
성심병원 김현아 교수가 <죽음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책을 펴냈다. 김현아 교수는 ‘죽음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함께하는 존재’라 했다. 그러면서 죽음과의 이별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인간존재가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현아 교수는 죽음을 3단계로 분류했다. 1단계는 사고를 당하거나 내부기관이 허약해져 스스로는 외출을 못하여 외부활동을 못하는 단계로, 이를 ‘사회적 사망’이라 했다. 2단계는 침상을 벗어나지 못해 배변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단계로, 이를 ‘생물학적 사망’이라 했다. 3단계는 음식을 넘기지 못하여 인위적 영양공급의 ‘식물상태’라 했다.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거다. 살아 있음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거다. 인간이 사회적 사망 상태에 이르면 어떻게 될까? 생명의 멈춤이다. 생물학적 사망이나 식물상태가 되면 기억되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변하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 죽겠다고 현대의학을 맹신하며 매달리는 것이 생명의 존엄성일까? 인간의 가치일까?
김현아 교수는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 ‘슬기로운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는 슬기로운 죽음 5가지 방법을 말했다. 첫 번째, 유언장 작성과 재산 정리다. 죽으면서까지 통장비밀번호를 혼자 간직해 가족들을 다투게 하지 말라는 거다. 두 번째, 나의 상황을 잘 아는 의사를 가깝게 두라고 했다. 세 번째, 병원치료를 중단하라고 했다. 네 번째, 치료거부 의사다. 어느 상황이 되면 자연에 맡기라는 거다. 마지막, 오늘을 소중히 여기라고 했다.
글쟁이 김훈은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 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파이프를 꽂아서 붙잡아 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삶은 무겁고 죽음은 먼지처럼 가볍다고 했다.
나는 오래 살겠다고 유난 떨면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마음의 부채를 쌓고 싶지 않다. 나는 연명치료를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목에 구멍 뚫리고 코로 파이프가 드나드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 어떠한 생명유지조치도 원하지 않는다.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하고 싶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죽은 자에 대한 남아있는 자의 기억이 평온이라면 죽음은 축복이다. 죽음은 산 자의 이야기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