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 (順理)

대부분 5, 6학년이 되면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배지인 한 분은 이보다 1년 더 빠르게 배신(?)을 경험했답니다. “아이구, 김 사장. 말도 말아요. 우리 손자녀석이 아기 때부터 할아버지라면 아주 껌뻑 넘어가던 ‘할아버지 껌딱지’였어요. 어디를 가든 나만 졸졸 따라다녔고 농장에 갈 때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항상 데리고 다녀야 했어요.”

그런데 그토록 할아버지밖에 모르던 손자가 2학년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거리감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4학년이 되고 나서는 용돈을 줄 때나 얼굴을 볼 수 있지 그 외에는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며 서러움(?)을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세상 사는 순리(?)인걸…. 녀석들한테도 엄연히 녀석들만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하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겁니다. 때문에 아내와 저는 녀석들이 순간순간 안겨주는 기쁨과 행복과 사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짧은 방학이 시작되던 날, 우리는 두 녀석을 이스트우드의 한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그날따라 아침에 비가 촉촉히 내려서 길은 물론, 식당 바닥도 적잖이 미끄러운 상태였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다가 우리를 발견한 에이든과 에밀리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외치며 쏜 살같이 달려 들어왔습니다. 아내와 저는 행여 넘어질세라 마주 달려나가 한 녀석씩을 품에 안았습니다.

우리는 늘 그렇게 몇 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호들갑을 떨며 얼싸안고 반가워합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스킨쉽을 자주 해 이제는 아주 생활화(?)가 된 듯싶습니다. “잘 놀았어? 방학하니까 좋아?” 녀석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입니다.

사실은 녀석들과 2, 3일 전에도 짧은 만남을 가졌었습니다. 플레밍턴마켓에서 이런저런 과일들을 많이 샀던 터라 조금씩 나눠주기 위해 집에 가는 길에 깜짝 방문을 했던 겁니다. 뜻밖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난 녀석들은 맨발로 달려 나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안겼고 에이든은 장난감 쪽으로 제 손을 잡아 끌며 “이거 같이 하자요” 했습니다. 하지만 채 1분도 안돼 돌아서는 우리가 야속해 녀석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습니다.

다음 날도 우연히 눈에 띈 마카롱 세트가 너무너무 맛있어 보여 집어 들고서 녀석들을 찾았습니다. 역시 예정되지 않은 만남이었기에 우리는 곧바로 돌아섰습니다. 이번에는 에밀리가 한 마디 했습니다. “왜 자꾸 가?” 집까지 와서는 함께 놀지 않고 가버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불만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응, 오늘은 일찍 가고 나중에 할매 할배가 짜장면이랑 탕수육 사줄 게” 하며 돌아 나왔는데 이틀 후 그 약속을 지킨 겁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녀석들은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재잘댔고 웃음소리가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식으로 햇살이 따뜻해진 카페 뒷마당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는 편안하고 오붓한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 옆에 앉아.” 에밀리의 지엄한(?) 분부에 우리는 다같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두 시간 넘게 녀석들과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에이든은 보면 볼수록 멋지고 잘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못 생겼다고 구박(?)을 했던 에밀리도 지금은 엄청 귀엽고 예쁜 소녀가 됐습니다. 아내와 저는 우리에게 두 녀석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한없이 고맙고 행복합니다.

“뽐아, 이담에 할배랑 팔짱 끼고 맛있는 거 먹으러 많이 다니자.” 봄이는 아무래도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섬세하고 잔정이 많습니다. 살인미소로 늘 우리를 심쿵하게 만드는 훈이도 여전히 정이 넘치지만 아무래도 사내아이이기 때문에 점점 그 강도가 덜해질 것입니다.

“나중에 이든이, 뽐이 대학생 되면 할매 할배랑 쏘주도 같이 마시자!” 너무 이른 주문이긴 하지만 우리는 녀석들이 성인이 되면 꼭 맛있는 곳에 가서 맥주도 소주도 함께 마시며 녀석들의 스토커가 될 준비를 지금부터 하고 있습니다. 은연 중에 기분 좋은 세뇌교육(?)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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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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