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 존중해주고 활용하도록 배려하는 교회

성경이 가르치는 건강한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각기 다르고 다양한 은사 (gift/talent)를 존중해주고 활용하도록 배려하는 교회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에 ‘어떤 은사가 질적인 면에서 더 좋은 은사인가?’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은사는 질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01_은사의 존중과 활용, 배려
은사의 다양성은 하나님께서 직접 디자인하셨고 몹시 기뻐하신다. 다양한 은사는 성도와 성도 사이의 비교 혹은 시기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어떤 은사가 어떤 기능을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활용되느냐가 서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은사는 각기 다양하고 다르지만 한 하나님(the same God)으로부터 왔으며 (come from), 한 주님 (the same Lord)을 섬기게 위해 사용되며 (used to serve), 한 성령님 (the same Spirit)으로부터 영감 되어졌음을 (inspired) 잊지 말아야 한다. (고전 12:4-11)

어떤 은사도 다른 은사에 비해 열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월하지도 않다. 모든 은사는 그 자체로 특별하고 (unique) 가치가 (valuable)있다. 어떤 은사도 나이, 성별, 학벌, 지위 등에 따라 차별되게 취급되어선 안 된다.

무가치하거나, 중요치 않게 인식되어도 절대 안 된다. 각기 다른 다양한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 (the Body of Christ)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한 지체의 은사가 다른 지체의 은사를 대신할 수 없다. 한 지체의 역할이 다른 지체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간의 몸 (the human body)을 예로 든다. 발의 기능이 손의 기능을 대신할 수 없고, 눈의 기능이 귀의 기능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고전 12:14-20) 나아가,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어’ 혹은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고전 12:21)

각기 다른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되어야 한다. 공동체 전체가 한 하나님 (one God), 한 주님 (one Lord), 한 성령님 (one Spirit)안에서 연합하도록 (united) 사용되어야 함을 바울은 강조한다. (고전 12: 12-13)

오늘 우리의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사들을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공동체 전체가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 안에서 연합하도록 돕는 데 사용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02_돌봄을 실천하는 교회
성경이 제시하는 건강한 교회는 성도들/지체들간의 ‘돌봄’ (caring)을 실천하는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 24-26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편협 되지 않은 똑같은 돌봄 (caring )과 똑같은 사랑 (agape love)을 보여주라고 격려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향한 돌봄은 공동체의 연합을 이루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 돌봄의 사역 (pastoral care)은 우리의 배경과 상관없이 차별 없이 베풀어져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강조한다.

우리가 누구든지 (whoever we are),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whatever we do) 상관없다. 우리의 사회적인 위치, 경제적인 상황, 민족, 성별도 상관없다. 우리가 강자든지 약자든지 상관없이 편협함 없이 돌봄을 받고 베풀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26절에서 ‘돌봄’ (caring)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그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함께 그 고통을 나눠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그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함께 기뻐해야 한다. 서로를 향해 편협 됨 없는 똑같은 ‘돌봄’을 실천하므로,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 전체가 연합됨의 은혜를 누리시길 기도한다.

 

03_부활을 증거하는 교회
마지막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지속적으로 감당하는 교회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몇 몇은 세상적인 사고와 경험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전 15:12, 35)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사고와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사에 한 번도 경험되지 않은 유일무이한 기적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매일 매일의 삶으로 경험되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는 초이성적이고, 초현실적인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도전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모든 믿음은 허상이며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전 15:17)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스로 고난과 힘겨움의 삶을 선택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그들의 모든 죄를 씻어주었음을 믿고 그 은혜에 감격해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힘겨운 삶을 인내했다.

만약 몇몇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 (historical fact)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단 말인가? 그들은 무슨 희망을 품고 살았단 말인가? 어떻게 매일 매일의 삶의 고통을 견뎠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신기루 같은 허상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죽었단 말인가?

더 나아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 제자들의 희생과 복음 전파는 헛것이란 말인가? 그들의 믿음 또한 헛것이었단 말인가? (고전 15:14)

어떻게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 만 사람들이 이 헛된 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로마제국 통치하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이 헛된 것에 현혹되어 스스로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단 말인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중에 수많은 이들이 네로황제의 파티 연회장을 밝히는 횃불의 연료로 자신의 몸이 불태워지면서도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만약 그들 안에 부활의 소망이 없었다면 어찌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단 말인가?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하고 지속적으로 증인의 삶을 살았다는 역사적인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비논리적 (illogical)이고 비이성적 (irrational, unreasonable)이라 여겨지지 않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초청한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감격에 동참하라’고 권면한다. (고전 15:57) ‘주님 안에서 행한 모든 사역의 수고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의 사역에 견고함을 잃지 말라! 사역의 초심이 흔들리지 말라! 지속적으로 열심을 품고 사역에 더욱 힘쓰라’고 바울은 격려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권면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역을 한 순간이라도 멈추지 말라고!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찾아와 사역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승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성령님의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지속적인 증인의 삶을 살라고!

 

04_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명
지금까지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성경적인 교회,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크게 6가지로 요약해보았다. 우리의 교회들이 이 6가지 중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갖추고 있다면 분명히 성경적인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의 가장 이상적인 (ideal) 모습이 될 것이다.

물론 아직 이 모든 요소를 다 갖추지 못한 교회라고 실망하지 말라!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극히 ‘정상적’이다.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 해도 낙심하지 말라! 이 땅에서 그런 이상적인 교회 모습을 갖추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을 아는 그리스도인만이 천국 (heaven)을 갈망한다. 부족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천국을 더욱 갈망한다. 부족함이 도리어 축복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바울이 제시하는 그런 완전체의 교회 (the perfect church), 이상적인 교회 (the ideal church)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교회는 천국에서만 존재할 수도 있다. 만약, 이 땅에 그런 교회가 존재한다면 그 교회는 분명 천국일 것이다.

그런 교회에 속해있는 성도들은 오히려 천국을 갈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천국을 이 땅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데 또 다른 천국을 갈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심하라! 수많은 이단들이 이런 부분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사람들을 현혹한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완벽하지도, 완벽할 수도 없는 교회라고 인정하자!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그런 성경적인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오늘도 몸부림쳐야 한다. 결코 포기하면 안 된다.

이런 몸부림,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하나님 사명 (mission)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소명 (calling)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완벽한 교회 (the perfect church), 완벽한 예수그리스도의 공동체 (the perfect Christian community),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 (the perfect kingdom of God), 천국 (heaven)을 소망하자. 이것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다.

글 / 권오영 (철학박사· 알파크루시스대학교 한국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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