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바보들

이 세상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온통 손주바보들인 것 같습니다. 피곤하다면서도, 몸이 아프다면서도 손자손녀들에 관한 일이라면 절대로 ‘NO!’를 못하는 게 그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화나고 속상하고 짜증나는 일이 있다가도 손주들을 보면 아니, 손주들에게서 전화만 걸려와도 그들의 얼굴에는 금세 세상 밝은 미소가 가득해집니다.

요즘 한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 탤런트 백일섭 씨도 못 말리는 손주바보입니다. 8년전 부인에게 이른바 졸혼 (卒婚)을 선언하면서부터 딸 지은 씨에게서 절연을 당했던 그는 최근 이 프로그램을 통해 딸과 함께 7년만의 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심하고 아빠를 피했던 딸도 이제는 아빠와 함께 식사도 하고 쇼핑도 하고 머지않아 여행도 할 기세입니다. 딸과 서먹서먹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관계가 계속되는 가운데 7년만에 처음으로 딸네 집을 찾은 그의 얼굴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가 가득합니다. 시연, 필로, 시아 세 손주들을 향한 백일섭의 미소는 가히 천만 불짜리 미소와 다름 아니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봄이의 우렁찬 구령에 맞춰 두 녀석이 나란히 아내와 저를 향해 세배를 합니다. 어찌나 기분 좋고 씩씩하게 세배를 했던지 훈이는 그만 바닥에 이마를 찧고 말았습니다. “그래, 너희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하면서 할머니가 건네준 예상 밖 거액(?)의 세뱃돈을 받아 든 훈이와 봄이는 둘 다 입이 함박만해졌습니다.

너무 작고 소중해서 안아 올리기조차 조심스러웠던 두 녀석이 어느새 아홉 살과 여섯 살 반을 바라보는 나이로 훌쩍 자랐습니다. 곱게 차려 입은 한복이 두 녀석 모두 잘 어울리고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복 주머니도 귀엽고 앙증맞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받은 세뱃돈들은 이번에도 두 녀석 모두 잘 아껴뒀다가 녀석들이 필요한 걸 사는데 쓸 것입니다.

지난해 11월에는 “할아버지, 피 많이 뽑았으니까 이걸로 고기 사먹으세요!” 하면서 에이든이 그 귀하디 귀한 쌈짓돈 중 거금 50불을 제 손에 쥐어줬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의 50불짜리 지폐는 지금 예쁜 액자에 담겨 우리 집 거실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제 녀석들의 소중한 세뱃돈이 그렇게 쓰이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생선전을 무지무지 좋아하는 ‘생선전 킬러(?)’ 에이든을 위해 아내는 설 전날 한국슈퍼에서 커다란 생선 필렛을 샀습니다. 녀석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낸 ‘할머니 표 생선전’을 훈이는 앉은 자리에서 한 접시 뚝딱 비워냈습니다. 실제로 녀석은 잡채며 불고기며 떡국보다도 생선전을 훨씬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니었을 겁니다. 이 세상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설날을 맞아 세배를 하는 예쁜 손주들로 인해 곳곳에서 무장해제를 당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녀석들의 고사리 같은 손에 세뱃돈을 쥐어주며, 녀석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틈이 없었을 겁니다.

운 좋게도 지난주에는 훈이와 봄이를 두 번이나 만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저의 생일이었던 지난주 월요일 저녁에는 두 녀석이 목청을 높여 ‘사랑하는 할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를 노래했고 설날 아침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덕담을 해줬습니다.

‘4학년만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를 안 좋아할 것’이라는 선배지인들의 경고(?)에 따르면 이제 3학년이 된 훈이는 올해가 우리와 살갑게 지내는 마지막 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같은 경고를 믿지 않으려 합니다. 할매 할배와 만날 때 그리고 헤어질 때, 한번으로는 아쉬워 여러 번 허그를 하는 녀석들의 따스한 마음은 앞으로도 우리 곁에 오래오래 머물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녀석들과의 3박 4일 여행… “에이든, 이번에도 할매 할배랑 같이 잘 거지?”라는 저의 질문에 녀석은 특유의 살인미소와 함께 격하게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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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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