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내외가 앞장서서 오랫동안 살던 집을 팔고 새로운 집을 구했다. 먼저 살던 집에서 시내 쪽으로 더 내려왔다. 주위는 어머니의 품처럼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숲으로 둘러싸인 산책길은 숨쉬기에 맑고 좋았다. 집 건물은 아담했다.
정원으로 내려섰다. 푸른 잔디에 몸뚱이를 눕히고 내 가난한 영혼에 포근한 초록빛이 물들기를 바라며 들어선 정원은 제법 넓었다. 한데, 어지러움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원은 자연이 아니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농장을 방불케 했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은 농사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경제적인 여유에 보태겠다고 정원을 마구잡이로 허물어놓았다. 살기 위한 몸짓으로 자연을 헤집고 부수는 야생동물의 본능이 아닌, 더 많이, 더 배부르게 움켜쥐고 싶은 욕심의 본능이었다.
정원에는 잔디가 없었고 향기가 없었다. 나무도 새도 꽃도 나비도 없었다. 넓은 정원이 온통 인간들의 먹거리인 무, 상추, 파, 부추 등등 이름 모를 야채들로 넘쳐났다. 담벽을 등지고 늘어선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한 도구와 재료는 낯설었다.
쓰레기 치우는데 사용돼야 할 쓰레기통에는 쓰레기가 들어있지 않았다. 야채의 성장을 위한 액체 거름통으로 변형돼 악취가 출렁거렸다.
정원 한가운데 서있는 키 큰 버찌나무는 늙고 지쳐 초록빛을 잃고 저승사자의 검버섯처럼 회색 빛 껍질을 뒤집어쓴 채 오늘 죽을 듯 내일 죽을 듯 힘겹게 서있었다. 정원 가장자리에는 베어져 버린 직경 50Cm는 족히 될 거목의 그루터기가 상처로 남아있었다. 경제적인 풍요를 탐낸 가슴 아픈 파괴의 흔적이었다.
거목으로 우뚝 서있다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도 은은한 달빛도 영롱한 별빛도 품에 안을 수 있을 텐데.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오면 그늘 짙은 나무아래 앉아 ‘젊은 베르테르’에게 영혼의 편지를 쓸 수 있을 텐데. 가을 깊은 어느 멋진 날 잎 진 가지 사이로 파랗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 보면 상처받은 하루가 치유될 수도 있을 텐데.
사람들은 정원 한곳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 사는 즐거움과 자연의 고마움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살아가는 작은 즐거움이 아닌, 더 많이 갖겠다는 욕심으로 온 정원을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해 파 뒤집어놓은 걸 보면 삶의 모짐과 거침과 메마름이 느껴져 아프고 쓸쓸하다.
나는 야채를 키우는 방법을 잘 모른다. 먼저 살던 집 뜰 한 귀퉁이에 텃밭이라고 하기에도 남사스러운 손바닥만한 터를 일궈 상추, 깻잎, 고추를 심어 아침 저녁으로 물만 열심히 준 적이 있다. 때맞춰 비료를 줄 줄도 모르고 그저 물만 줬더니 깻잎은 크기가 어린아이 손바닥만 했고 고추는 달랑 몇 개 달리다 말았고 상추 잎은 워낙 작아 두세 장 포개야 겨우 한입 거리가 됐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나는 한심스럽게도 흔히 알려져 있는 먹을 수 있는 야채 외에는 야채인지 잡초인지 잘 구분을 못한다. 그들이 남겨두고 간 야채들을 모아 텃밭을 건사할 능력이 없었다. 농사지을 도구와 재료를 활용해 경제적인 풍요에 보탬이 될 자신도 없었다. 그럴 바에는 마음의 풍요라도 얻고 싶었다.
늘 뭔가 더 얻으려고 지치던 삶을 이젠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 새로운 터전에서는 담백하고 투명한 삶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내 삶의 세월에 살기 위해 몸짓하는 새도 벌도 나비도 동행하고 싶었다.
정원을 갈아엎었다. 아는 사람들이 먹을 만큼 거둬가고 버려진 야채들을 파내고 정원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고됐다. 허리는 천근만근이었고 손가락은 부어올라 주먹 쥐기가 어려웠다. 고국 농촌에서 꼬부랑 할미가 방석을 깔고 앉아 엉덩이로 밀어가면서 텃밭을 매듯이 그렇게 했다. 어설프나마 며칠 걸려 힘겹게 정원을 다듬어 나무 심고 잔디 씨 뿌리고 꽃 키울 준비를 했다.
맑은 날 아침에 식물원에 갔다. 정원 가에 심을 사철 푸르른 나무와 과일나무를 고르고 잔디 씨 뿌리는 요령을 배웠다. 배운 대로 심고 뿌렸다. 비료를 쏟아 부운 버찌나무와 잔디 씨 뿌린 정원에 아침 저녁 물주는 것이 일상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 멋진 어느 날 아침! 마침내 샘물 같은 잔디가 합창하듯 고개를 내밀어 온 뜰을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지친 버찌나무 몸뚱이에 파릇한 잎이 돋고 꽃이 피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렇게 마음이 풍요로울 수가! 온 뜰이 환희의 찬가로 넘쳐났다. 눈부시도록 푸르른 세상이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