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원을 걸어가고 있었다. 흰색, 노란색, 빨간색의 커다란 장미들이 온 거리에 가득했다. 마치 무지개 길을 걷는 것 같았다. 길가에는 하얀 눈이 쌓인 듯 크로바 꽃들이 길을 덮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가에 하얀 모시 저고리를 입은 할머니의 웃고 있는 모습과 만났다. 할머니 계신 곳으로 발을 옮기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고 있다는 걸 느끼며 눈을 뜬 건 병원이었다.
내가 수혈하는 동안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눈을 뜨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내 영혼은 그 황홀했던 꽃밭에 묻혀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간호원이 가져다 준 따뜻한 우유 한잔을 마시고야 정신이 번득 났다. 애들을 찾으니 간호원이 애들은 밖에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내 앞가슴은 흘러나오는 젖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큰애의 유치가 말썽이 나 남부종합병원의 치과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 O형 피를 가진 사람을 다급하게 찾고 있는 병원 내 방송을 듣게 되었다. 이층 분만실에서 산모가 위급하단다. 그때만 해도 혈액원이 없어 응급환자가 생기면 병원 내에서 피를 구한다는 방송을 가끔 들은 적이 있었다. 또 한번 방송을 통해 O형 가진 사람을 찾는다는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과에서 큰애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태어난 지 20일 된 간난아이를 옆에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 맡기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틈도 없이 비상구를 통해 단숨에 달려갔다. 간호원과 의사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 산모의 위급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말을 할 시간도 없었다. “O형 맞습니까?” “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팔에 주사바늘을 꼽았다. 연결된 호수를 통해 붉은 피가 옆에 누워있는 산모에게 들어가는 게 보였다.
침대에 누워 그때서야 숨이 턱에까지 찼던 가슴을 쓸어 내렸다. 간호원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라고 일러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꾸 잠이 쏟아졌다. 그때 내가 정신 줄을 놓은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팔에는 주사바늘이 꽂혀 있었다. 나에게 또 다른 사람이 수혈을 해준 것이다. 수혈을 해준 그 청년은 할머니 병문안 때문에 병원에 왔다가 병원 내 방송을 듣고 달려왔는데, 내가 먼저 산모에게 피를 공급하고 있어 내가 끝나면 그 청년 것을 더 수혈해주기로 하고 기다리다 내가 출산한 지 얼마 안된 젖먹이 엄마라는걸 모르고 정상인들에게 뽑는 피의 양을 뽑다 이런 사고가 났던 것이다.
앞가슴에 흐르는 젖을 보고 나서야 의사와 간호원들이 놀라 발을 동동 굴렀다 한다. 자칫하면 두 사람의 생명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청년의 수혈이 아니었으면 심장이 마비될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모두가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정신을 차린 나는 산모에게 다가갔다. 유난히도 희고 가는 손이었다. 꼭 잡아주었다. 꼭잡은 우리의 두 손을 나에게 피를 공급해준 그 청년이 두 손으로 힘껏 쥐어주었다. 모두가 할말이 없었다. 우린 서로 가장 값진 것들을 주고 받은 사람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때 밖에서 어린 것이 배고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려는데 어지러웠다. 복도에 나가보니 할머니는 이마의 땀을 닦고 계셨다.
어린 것은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콧바람 소리까지 내며 불어있던 젖을 다 빨아먹고서야 잠이 들었다. 내가 하도 급하게 애들을 놓고 뛰어가길래 화장실이 급해 뛰어간 줄 알았다며 할머니는 애태운 것도 잊은 채 내 등을 연실 쓰다듬어주셨다. 보호자가 있어야 집에 갈 수 있다며 간호원이 남편 회사에 전화를 한 것 같다. 허겁지겁 남편이 뛰어왔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놀래켜 주는 마누라에게 이번에는 군밤 한대로 용서를 했다. 의사선생님이 집에 가는 우리를 배웅해주셨다.
영아실 창 너머로 쌍둥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간호원이 흰 봉투를 들고 나왔다. 열어보니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헌혈증이었다. 배웅 나온 쌍둥이 아빠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파란 하늘이 새롭게 보이고 세상 모든 게 아름답게만 보였다. 주는 기쁨은 영원한 것. 내 피가 어느 누구에게 흘러들어 생명을 꽃 피운다는 게 마음을 부자로 만드는 것 같았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상큼한 바람이 내 얼굴을 살포시 더듬는다.
글 / 변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