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온혈 난생으로 몸이 깃털로 덮이고 날개가 있는 척추동물의 한 강 (綱)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8600여 종의 새가 존재한다. 새들은 날아오름을 통해 번식, 영역표시 같은 자신의 감정과 존재를 표현하여 사회적 상호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새들의 아침 노래는 인간의 삶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다. 더불어 새의 노래는 그리움, 기다림 같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부 문화에서는 새의 노래는 사랑의 몸짓이며, 새의 날갯짓은 희망, 도전,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970년에 발간된 <갈매기의 꿈>이라는 소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화로 평가되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 리처드 바크 (Richard Bach)는 미국인으로 전직 비행사였다. 그는 소설 속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Jonathan Livingston)’을 통해서 비행에 대한 꿈과 신념을 그리고 있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다른 갈매기들과 다르게 더 높이, 더 멀리 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그 꿈을 향한 끝없는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지만,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기존의 한계를 극복한다. 이 소설은 자기초월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문부호를 던진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조나단처럼 더 높은 곳을 향해 날으려고 한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 최초의 심리주의 소설이라는 이상의 <날개>에서도 비정상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배회하는 주인공은 그 삶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며 날수 있기를 기대하고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기를 소망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섬이 아니다. 대륙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대륙이라고 하지만 새들에게는 멀고 높고 넓은 하늘이다. 그는 시드니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넓은 대륙 구석구석을 더듬고 다닌다.
내가 글 쓰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5년전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때나 70이 눈앞인 지금이나 세상을 새처럼 날아다닌다. 그는 여행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함을 넘어 광 (狂)이다. 거창한 삶의 목표가 있어서도 아니고 과정 때문도 아니다.
그는 ‘몸뚱이 떨릴 때 말고 가슴 떨릴 때’라며 걸핏하면 하늘로 날아오른다. 혼자가 아니다. 어김없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날은다. 어느 조류학자가 말했다. 새는 밤이나 낮이나 서로를 다독이고 주시하고 지키면서 날아다닌다고. 그것이 새들의 일상이며 삶이며 사랑이라고. 해서 정녕 그는 새다.
그는 틈만 나면 사랑하는 아내와 먼 하늘을 날아다닌다. 때로는 마음 맞는 동료들과 어울려 어느 곳인지 모르지만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올라 하늘을 맴돌다 햇살 밝은 대지가 눈에 띄면 내려앉는다.
내려앉아 낚시도 하고, 천렵도 하고, 파도소리 갈매기 소리 들으며 지친 날개를 달랜다. 달빛이 천지를 덮으면 다시 나래를 펴고 날아 오른다. 달빛아래 보이는 강 물빛 소리, 산 낙엽 소리, 바람 꽃 소리, 들풀 젖는 소리는 끝없는 평화다. 마음이 가자고 하면 잠시도 머뭇거림 없이 어디든 그렇게 높이 멀리 날아오를 수 있는 삶은 얽매이지 않은 진정한 자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다. 그는 때로 함께 나는 새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먼 하늘을 날아 작은 대륙을 벗어나기도 한다. 더 크고, 더 넓고, 더 높은 하늘을 날고 싶어서다. 그들은 때론 유라시아를 향해 긴 여정의 날개를 퍼덕인다.
더 높은 산과, 더 넓은 강과, 더 깊은 바다와, 더 푸르른 들판을 휘돌고, 바람을 타고 눈송이 하늘거리는 하늘을 날면서 살아있음을 감사한다. 살아 있음은 날수 있음이요, 날수 있음은 살아있음 임을 알아 날음을 사랑한다.
새는 자꾸만 날아만 간다. 살아있음의 열정이다. 그는 말한다. “건강이 되고 마음이 되면 나는 언제든 날고 싶다.”
새는 먹이를 얻기 위해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날으는 자체를 사랑한다. 높이 멀리 날아 진정한 자유와 자아실현을 위해 비상 (飛翔)할 뿐이다. 새는 나무를 날으면 나무가 되고, 숲을 날으면 숲이 되고, 강을 날으면 강이 되고, 바다를 날으면 바다가 된다. 새는 그렇게 세상에 어울려 날아다닐 거다. 돌아올지언정 날아다닐 거다.
높디 높은 창공에서 평화롭게 날갯짓 하는 새의 눈에는 세상은 좁디 좁은 단편적인 생각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살아있다고 치고, 받고, 흔들고, 잘난 체하고, 있는 체하고, 아는 체하며 소리지르는 것들이 소나무 잎새에 매달려 꾸물대는 눈먼 송충이처럼, 먹거리를 챙기려고 줄지어 끊임없이 쉼 없이 행진하는 숨가쁜 개미들처럼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다.
하늘이 허락한 나의 남은 날들이 얼만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나도 새처럼 날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에 아득하고 아프다. 한 곳에 머물러 날지 못함은 날개 다친 새다. 상처 입은 새는 날지 못한다. 저 하늘높이 날지 못하는 새는 넓고 깊고 높고 따뜻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볼 수가 없다.
살아있음을 사랑하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있음의 겸손함을 온몸 깊숙이 담고 싶거든 새처럼, 그처럼, 조나단처럼, 높이 멀리 날아오르라! 새가 존재하는 의미는 언제 어디든 날아가는 것이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