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바람이 쌀쌀하다. 항상 그렇듯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또 계절이 바뀌나 보다. 왜 그런지 계절이 바뀔 때면 그리움이 더해진다.
내 삶의 기둥이었던 둘째 형님이 세상 떠난 지 어언 반년이 돼간다. 위독하다 해서 부랴부랴 쫓아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이렇게 무심히 흘렀다.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는 형님을 붙잡고 일어나시라고 울부짖었다. 그 응답이었던지 형님은 깨어났다. 의식이 돌아오고 자식들과 소통하고 식사하는 형님을 보고 하늘에 감사했다.
형님 곁에 좀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내 몸뚱이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쓰러져도 아내와 자식들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왔는데 6개월을 못 넘기고 갑자기 하루 새에 조용히 떠나버렸다. 눈감으면 그리움만 쌓인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몸뚱이가 휘청거려도 더 오래 형님 곁에 머물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따뜻한 눈빛과 걱정으로 바라보는 형님 앞에 앉아서 혼자 술잔도 기울이고, 우리 형제가 살아온 날들을 추억하면서 더 많이 함께 있어야 했다는 생각에 후회와 미안함으로 가슴이 많이 아프다.
형님이 떠난 뒤에 이제 내게 남은 날들도 그리 많지는 않다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이세상에 무엇을 남겨두고 갈까. 희끗한 머리카락 한줌, 바튼 기침 한 두름일까.
습관이 되어버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평생 꿈틀거린 ‘별것도 아닌’ 나의 날들이 흑백영화처럼 펼쳐졌다.
내 아버지는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집어삼킨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대동아전쟁 (세계2차전쟁)당시 전라남도 순천 금곡동 동장으로 일했다. 당시 식량은 배급제였다. 가구당 할당량은 일본인 면장이 정했다. 그런데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식량보다 조선인들의 식량이 훨씬 소량이었다.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불만을 품은 아버지는 일본인 면장을 찾아가 조선인에 대한 식량배급 차별을 항의하다 어깃장을 부리는 일본인 면장을 두들겨 패버렸다. 아버지는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았다. 아버지는 금곡동 영웅이었다. 내가 어려서 싸움질하고 돌아오면 어머니는 지 아부지 닮아서 싸움 잘한다며 빙긋 웃곤 했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순천전매처장으로 재직했다. 애주가이던 아버지는 전주 출장 다녀오던 길에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나는 두 살 이었다. 아버지의 시신이 금곡동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동민들이 운동장에 모여들어 엎드려 흐느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 떠나고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끼니를 걱정하게 되었다. 양반집 출신으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머니는 삼촌의 귀띔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주를 내려 밀매를 했다. 한밤중에 소주를 내릴 때면 칭얼대는 어린 나를 아궁이 불 앞에 눕혀놓고 밤새 소주를 내렸다. 내린 소주는 장독에 담아 뒷마당 땅속에 묻어 숨겼다.
밀주 신고하면 보상금을 받는다는 걸 아는 숙모가 밀고했다. 세무서 직원이 들이닥쳐 숨겨둔 술독을 들어올렸다. 어머니는 장작개비로 술독을 깨 소주를 땅바닥에 쏟아내면서 소리쳤다. “못 갖고 간다. 이놈들아!” 내 어머니는 약한 듯 강했다.
힘든 삶은 어머니를 옥죄었다. 어머니는 금쪽같은 아버지의 자식들이 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밤잠을 설쳤다.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가자고 결심했다. 고향을 떠나 흰 연기 내뿜는 검은 기차를 밤새도록 타고 서울 사는 누님 곁으로 올라왔다. 매형은 해병대 장교였다. 봉급이 몇 푼이나 되었겠는가. 그런데도 매형은 빈대 붙은 처남들에게 싫은 표정 한번 짓지 않았다.
나는 어려서 키가 유난히 작았다. 중학교 때까지도 앞에서 3-4번이었다. 지금 키는 고등학교 재수할 때 훌쩍 자란 거다. 나는 전라남도 순천 남국민학교 3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후암동에 있는 삼광국민학교 4학년으로 전학했다.
반 아이들은 키 작은 나를 무시하고 툭하면 ‘을를래?’ 라면서 시비를 걸었다. 한번 싸워 보자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대답이 없으면 ‘전라도 개똥새’라고 놀려댔다. 뜻도 모르면서 제 부모에게 배운 못되고 더러운 흉내였다. 그때마다 나도 뜻도 모르면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아 싸움을 했다. 나는 싸움하는 걸 배운 적이 없다. 키 작은 나는 그냥 이 악물고 싸웠다. 싸울 때마다 애들은 코피가 터졌다. 애들은 점차 나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지금 아이들 말대로 학교 ‘짱’이라는 녀석이 나와 친하고 싶다고 했다. 동대문운동장 뒤로 나와서 같이 놀자고 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면 신문배달을 하는 나는 녀석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때 녀석과 어울렸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생뚱맞은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우리 형제는 4남2녀다. 작은누나는 배다른 누나다. 가수로 활동했다. 김추자가 부른 ‘댄서의 순정’이라는 노래는 작은누나가 최초로 불러 취입한 노래다. 누나가 마흔 무렵 소식이 두절되고 일찍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큰누나는 우리 형제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국민학교 교사로 6.25전쟁을 맞아 순천을 점령한 인민군의 ‘어머니와 동생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여맹위원장’이라는 완장을 찼다.
휴전이 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누나를 체포하려 했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등에 업고 누나를 데리고 산속으로 숨어 다녔지만 결국은 체포됐고 누나는 감시 당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의 청혼을 받아 결혼함으로써 모든 감시에서 풀려났다.
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