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에 매달리는 기억들

흐린 가을날씨에는 생각이 더 먼 곳으로 떠난다. 시야가 안개평야로 펼쳐져 있음으로 지칠 기색도 없이 멀리 아주 멀리까지 가보는 것이다. 거기에 서 있는 한 아이에게, ‘둠벙에 떨어지는 별들’ 이라고 이름지어주었던 거기까지.

비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젖은 새벽 잠 한쪽을 째고 콩 줄기 피어오른 듯 비는 빗줄기를 타고 힘차게 오른다. 숲에 사는 어린 것들처럼. 먼 곳을 소환하는 능력이나 감지가 뛰어나서 시간이나 장소를 넘나들며 냄새를 앞세워 움직인다. 나 역시 비가 오는 기미를 채면 기억을 자주 불러낸다. 비를 닮아가는 고전적인 습성이다.

 

내 기억은 4살에서 시작한다. 둠벙 옆을 지나가는 작은 여자애, 검정스웨터에 검정바지 코 넓은 검정고무신에 축구장만한 저수지를 곁에 끼고 꿈이 뭔지도 몰랐을.

청석골로 휘돌아가는 노란 신작로와 대나무밭 사이로 외가는 보일 듯 말 듯, 그쯤이면 이모나 외할머니가 겅중겅중 뛰어오는 그런 빗줄기를 먹고 컸다. 젖멍울이 맺힐 때까지. 그 살아 뛰는 풍경에 발 폭을 넓혀 바다 건너와 살면서도 흐린 날이면 물수제비를 그 곳으로 핑핑 던지곤 한다. 그동안 내 안의 첨벙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집을 짓고 밥상에 둘러앉아 식구 수를 늘였다. 살아가는 동안 이리 많은 사연이 물에 담겨 있는 줄 누가 알았을까.

 

-족두리 쓰고 인견으로 만든 오방색 장삼소매자락 모우고 회갑사진 찍던 외할머니, 그 옆에 한사코 앉아 나이를 더 먹겠다고 고집 부리던 아이,

-식구들 겨울 몸보신시키겠다고 소금 멕여 물가로 끌고 가던 외삼촌의 젖은 발목과 귓가에 길게 남은 염소의 울음소리

-누렇게 흐르는 코를 닦아 반질거리는 소매를 달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저수지에서 놀던 아이들. 대나무를 길게 쪼개 신발바닥에 묶고 미끄럼을 타며 환호성을 지르던 찬 기운에 아랑곳없던.

 

그렇게 철이 들어갔다. 밤이면 온갖 동네 이야기가 두런거리며 피는 곳, 칠흑 같은 입을 묻고 오금을 저리며 지나갈 땐 오싹한 기운이 한사코 물속으로 잡아당길 것 같던 소름도 내 서정의 원적지에 간직되어 있다.

 

흐린 가을날씨에는 우리 집은 더더욱 소란하다. 바람에 나뭇가지 쏠리는 소리, 지붕이며 베란다에 물발자국 소리, 상심한 개 짖는 소리까지 우기엔 특히 그런 일이 잦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개 배꼽쯤이나 허벅지 뒤쪽에 숨어 버리고 싶다. 모친 냄새가 떠오를 때나 물김치가 먹고 싶을 때는 내 안의 엄마를 불러내어 나도 어머니 대접을 받는다. 주섬주섬 냉장고를 뒤져 그 입맛을 찾아낸다. 특히 무채나 새콤달콤한 오징어 숙회가 코끝을 자극하는 날 비안개 속에서 들어가 그 맛을 잡아온다.

살다보면 가까웠던 사람과 헤어지고 무너지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럴 때마다 난 무엇이든 쓴다. 뭔가를 소환해서 흔적을 남겨놓으려 한다. 그러기엔 이런 날이 제 격이다.

습기 덕에 연해진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바쁘게 치는 동안 안개에게 잡혀가도 좋다. 어디로든 사라져도 좋다. 프리카드 한 장 받는 기분이라 할까. 삶은 콩 껍질 불어나듯 계속 떠오르는 자책감,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언제 한번 뜨거운 연탄인 적 있으냐’고 호통 치는 안도현 시인의 한 구절과 ‘군말 없이 따라나서 준 도반’이란 허만하 시인의 나붓한 문장을 노자삼아 그 틈으로 떠나는 것이다.

안개에 먹힌 도시뿐만 아니라 모르는 나라, 오지까지 맘대로 출입해본다. 내년에는 세계일주를 하고 그 다음 해에는 뜨거운 사랑도 해보고 또 색다른 결혼을 꿈꿔본다. 깊이깊이 미지를 휘젓다보면 카타르시스에 이르러 맺힌 것이 풀리고 걸치고 있는 낡은 옷쯤이야 용서는 당연하고 관대해진다. 다툼 후에 가진 어색함은 사라지고 무거운 약속 같은 것에도 해방감이 든다. 사라지는 건 내가 아니다. 우기 속에 감춰두었던 안개 백신이 효능을 발휘한 것이다. 날씨가 흐리면 분주함을 내려놓고 잠시 몸을 내려놓는 진짜 이유다.

 

창밖을 내다보니 먹 색깔일 뿐 아직 비가 내릴 기색이 없다.

아침 8시 30분, 4월 30일, 목요일, 오늘 비가 100미리 온다고 예보를 들었다. 오후에 비를 보긴 볼 것인가. 나 같은 진짜 청개구리는 이 빗줄기 같은 집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늘 후회하며 울다가 때가 되면 마당 한 구석에 묻히게 될 것이다. 수목장이면 과분하다. 그때까지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옮겨 다니며 청색의 등허리를 말갛게 내놓고 목청을 팔딱거리며 울어댈 것이다. 괜한 소리가 아니다. 내가 아는 큰 물고기 한 마리도 창가에 누워 빈 하늘을 바라보며 눈만 껌벅거린 지가 10년째다. 큰 불효다. 그 물고기 밥은 다름아닌 몇 권의 추억과 손님들, 비가 몰아치거나 바람이 휘돌면 날아드는 꽃잎이나 잔가지들이 잠시 창문에 머물다 가는 빗속의 오두막에 누워.

나도 그 오두막에 점점 깃들어간다. 떨어지는 목련이나 동백꽃잎 바라보며 잔가지들 그러쥐고 속불 일으키듯 조그맣게 웃으려고 한다. 어린손님이라도 오면 한두 푼 모아둔 지전을 돌아가는 손에 은밀하게,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는 외할머니 바람처럼 내 몸에 스며든 오래된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작은 씨앗 같은 용돈이 다 떨어지면 또 달려오도록 내가 방학이면 외가로 줄기차게 달려가듯이.

 

그래, 사랑은 둠벙 기억에서나 하는 게 아니다. 오토바이 달려가듯 지금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움푹 파인 쇄골 한 구석에 오두막을 짓고 내가 살고 싶은 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마른 씨앗 주머니를 터트리는 것이다.

기어이 비는 올 것인가 오늘.

 

 

윤희경 (시인·캥거루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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